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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과 기쁨이 떠나다(사 16:10-14)

즐거움과 기쁨이 떠나다

사 16:10-14


폴 틸리히는 <즐거움>과 <기쁨>을 구분합니다. 사실 이런 개념은 어원상의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현실 속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4장 19절에는 바울이 언급하는 <해산의 고통>이란 게 나옵니다. 해산은 몹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게 결코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않고 고통스럽다고 해서 기쁨마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록 고통스럽기는 해도 기뻐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고통과 기쁨은 얼마든지 동시적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고통스런 기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에는 이제 그런 기쁨도 즐거움 조차도 다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그치니라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10절).

농부라면 누구나 기름진 밭을 바라보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또 즙틀에서 포도를 밟는 일 역시 그게 비록 고단할지라도 보람과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란 때로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의 고통이 즐거움은 앗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기쁨마저 빼앗지는 못한다는 얘깁니다. 당시 모압의 가장 큰 아픔과 불행은 지금까지 아름답고 풍성한 포도원에서 누렸던 노래와 즐거움, 사랑과 기쁨을 하루아침에 상실하게 됐다는 비극이었습니다. <… 떠난다>, <… 없어진다>, <… 그친다>는 등의 말씀이 다 그들이 앞으로 당하게 될 불행을 짐작케 하는 우울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주님이 정말 나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라면 때로는 맞을 줄도 알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매, 사랑하는 이의 분노, 사랑하는 이의 강요에 쫓기는 희열도 느낄 줄 알아야 그 사람이 진정한 신자입니다.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으리라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12절).

모압의 신들, 그 거짓된 신들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환난 앞에 선 모압은 자신의 우상들에게 온 힘을 다해 기도하겠지만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리석어서 우상이 헛되고 피조물을 의지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직접 겪어보고 깨닫기 전에는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당시 모압 사람들 역시도 산당에서 기도하다 지쳐도 하나님의 성소로는 나가지 않고 다시 모압의 최고신인 그모스 신전을 향했습니다. 모압 왕 메사는 거대한 그모스 신전을 세우고 자신은 물론 백성들에게 그모스를 수호신으로 섬기게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우상의 신전을 찾습니다. 우상 앞에 절하고 소원을 빌고 부적을 사고 복채를 바칩니다. 놀라운 사실은 믿는 자들 중에도 여전히 점집을 찾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삼가야 합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능욕을 당할지라>, <보잘 것 없이 되리라>(14절) 하신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실 지언정 우상에게 비는 일만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