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19m 파라클레토스(요 1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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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9m
요 16:5-14
파라클레토스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7절에 <보혜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보혜사는 주님이 성령에 대해 명명하신 말씀입니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파라>와 <클레오>의 합성어인데, <파라>는 곁에, <클레오>는 부르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곁으로 부름을 받아 돕는 자입니다. 영어로는 counselor, helper로 번역했습니다.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내 가까운 곳에서 나를 돕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주님이 성령에 대해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을까요? 주님도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을 떠나가시니까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주십사 기도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고아가 아니라고 하십니다(요 14:18). 주님이 우리 가까이에 계셨고, 성령도 우리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신자의 세상살이는 만만치 않습니다. 절대 내 힘, 의지로만은 안 됩니다. 보혜사가 반드시 내 가까이에서 돕고 격려하고 충동질하셔야 탈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며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8). 왜냐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성패는 전적으로 성령께 달려있습니다. 성령과의 관계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구약이 성부의 시대라면 신약은 복음의 시대, 성자의 시대이고,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령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보혜사이신 성령이 우리 곁에서 우리의 무엇을 돕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돕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게 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 잘 나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성령이 우리를 도우셔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장 큰 역할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잘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3절도 보십시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또한 요한복음 14장 26절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것 모두가 성령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내 의지로 예수를 믿는 것 같으나 이것은 어림없는 얘깁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성령에 붙잡혀야 비로소 신앙생활이 가능해 집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얼마나 갈팡질팡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최소 두 번이나 뵙고도 낙심천만해서 낙향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후 다들 불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누가 떡을 줍니까? 돈을 줍니까? 주일 아침에 전쟁하듯 교회에 나와도 은혜는커녕 상처와 시험만 들고 갑니다. 그나마 목사는 직업적인 종교인이라지만, 여러분은 헌금을 챙겨 와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발걸음 가볍게 감사하고 즐거워하며 예배에 나온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결단과 의지로 나온 게 아닙니다. 부모의 협박 때문에 교회에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강제하셨기에 성령의 작품입니다. 성령충만하십시오. 그래서 주님 오실 때까지 신앙생활 잘 하십시오.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이 복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기도를 청산유수처럼 잘 합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다들 시인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빌 바를 모른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성령이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우리처럼 빌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시는 잘 쓰지만, 무엇이 내게 필요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밤낮 구하는 것은 썩어질 것이며, 결국 내게 치명적인 흉기가 되는 것만 구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언제 우리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구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성령이 지금도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기도의 명수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우리를 가장 잘 꿰뚫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우리를 볼 때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하여간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계시니 우리가 지금 이만큼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산다고 생각하십시오. 성령충만하십시오. 중언부언, 횡설수설하지 말고 바르게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십시다.
성령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이 함께 하시면 가능합니다. 성령이 도우시면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성령이 역사하시면 다 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선으로 결말 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이하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질그릇인데 우리 안에 보배, 곧 성령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질그릇이 금그릇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질그릇 안에 내주합니다. 그래서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생생한 간증입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히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날마다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의 반대는 성령 소멸입니다(살전 5:19). 성령 훼방, 성령 근심이 다 성령충만의 반대말입니다(막 3:29, 엡 4:30).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얼마나 엄연한 사실이며 무섭고 놀라운 일입니까!
성령 훼방, 성령 소멸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입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에 무심하고 성령 역사에 둔감한 삶입니다. 믿는 자들은 모두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의식하지 않습니다. 성령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지 않고는 신앙생활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앙고백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성령은 내게 끊임없이 계시하십니다. 영성이 투명하면 성령의 계시에 응답하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과 전혀 교감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훼방입니다. 성령이 고뇌하다 더는 내 안에 계실 필요를 못 느껴 떠나면 그것이 바로 성령 소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내게 성령을 주십사 기도하지 않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 예민하게 응답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옳습니다. 성령이 내게 도전하실 때 내가 거기에 반응을 보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은 지 10년 되었다면 성령이 여러분 안에 10년간 계신 것입니다. 30년이면 30년 동안 계신 것입니다. 10년 혹은 30년간 성령이 여러분 안에서 고뇌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고뇌하고 소외된다면 그게 은혜가 되며 기쁨이 되겠습니까? 성령의 말씀에 교감하며 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빕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는 인정하나 실제 삶에서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게 성령 훼방의 또 하나의 전형입니다. 인간적인 욕구가 너무 강합니다. 성령이 감동과 깨달음을 주시며, 결단하도록 충동하시지만, 그런 감동을 묵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악성입니다. 성령이 감동을 주실 때 회개해야 하고, 성령이 감동을 주실 때 선한 일에 뛰어 들어야 하는데, 그것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고의적으로 안 들으려고 귀를 막습니다. 고약한 성령 소멸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접수하면 내가 골치 아프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성령 훼방입니다. 성령은 인격적 하나님입니다. 성령은 인격의 본체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 삶이 인격적이며 고상해야 합니다. 비열하게 사는 것은 성령 훼방입니다. 성령 받았다면서 광적으로 사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성령을 물량적으로 이해해서 불 받으라거나 성령 받으라고 하면서, 자기가 나눠준다는 식은 쇼입니다. 성령은 물량적인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령을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성령 훼방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생활, 가치관, 우주관 모두 건전하고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상식적이어야 합니다. 성령충만했다는 사람이 병적이거나 비상식적이거나 비신사적, 맹목적이면 올바른 게 아닙니다. 결국 이런 것은 성령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치부하는 행위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십시다. 늘 성령께 붙잡혀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역사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성령의 계시 앞에 전폭적으로 결단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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