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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3n: 간증과 헌신(요 12:1-11) 성가대 헌신예배

2011년 4월 3일 주일오후예배/성가대 헌신예배
본문: 요 12:1-11
제목: 간증과 헌신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주님이 공생애를 통해 한 집에 최소 3번 이상 찾아간 가정은 이 나사로네가 유일합니다.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사실 나사로네 가정은 결코 행복한 집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직 미혼입니다. 오라비 나사로도 아내나 자식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들의 부모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노총각인 나사로가 과년한 두 여동생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외롭거나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집보다 행복했습니다. 

왜냐면 우선 이 집에는 간증이 있었습니다. 무슨 간증입니까? 우리가 본 본문 앞장인 11장을 보겠습니다. 43절 이하입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벌써 썩어 냄새나던 나사로가 주님 말씀 한 마디에 무덤에서 되살아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입은 집입니다. 사실 오늘 잔치도 바로 주님이 베푸신 그 기적에 대한 보은의 잔치입니다. 그 사건이 감사해서 잔치를 벌인 겁니다. 본문 9절입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1절입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우리에겐 이런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간증거리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라는 찬송 가사처럼 성가대원들은 이런 자신의 간증으로 찬송해야 합니다. 이런 간증으로 찬양을 해야 합니다. 이런 간증이 없으면 찬양은 공허합니다. 백날가도 예수를 수 십 년 믿어도 이렇다 할 간증이 없다면 불행합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아름다운 체험담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 나사로의 간증을 듣기 위해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집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니까 유대인이 예수님만 미워한 게 아니라 나사로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가대원은 간증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 찬양에 하나님의 반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다음은 간증뿐 아니라 주님에 대한 희생적인 봉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별한 주님의 총애를 받았고 주님이 최소 3번 이상 나사로의 집을 방문한 겁니다. 본문 2절입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오늘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에도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마리아의 편을 드시는데도 마르다가 자기 하던 일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그만 뒀을 겁니다. 다 좋은 것을 택하면 좋지 않은 쪽은 누가 맡아서 감당합니까? 궂은일은 누가 합니까? 그게 비록 말씀 듣는 것보다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희생해야 주님을 위한 잔치가 성사됩니다. 더구나 이 잔치는 주님을 위한 최후의 잔치입니다. 주님이 최후로 그들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봉사는 칭찬이 아니라 야단을 맞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 합니다. 실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치고 욕 안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욕먹을 일 없습니다. 일 하면 욕먹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될까요? 하여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는 욕을 먹으면서도 봉사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이 드러내놓고 마리아가 옳다고 하더라도 일 해야 합니다. 칭찬 받고 격려 받고 인정을 받고 박수를 받으며 못할 일은 없습니다. 박수를 치지 않더라도 찬사가 없어도 그 일을 감당하는 게 빛 없이 이름 없이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이고, 이것이 값진 것입니다. 

제가 전에 신학교에 있을 때 주말은 강원도 홍천군 서면 도리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체 교인이 15명이고 성가대는 5명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성가대원은 예순이 넘었습니다. 그분들이 찬양하면 2부, 4부가 아니라 5부로 찬양했습니다. 다 각자 자기 소신껏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도 토요일 오후 2시만 되면 그 바쁜 농사일 다 접고 밭에서 흙구덩이가 되어 교회 모여서 두 시간 세 시간 연습합니다. 제가 찬송 들을 때마다 항상 조마조마 합니다. 저 찬송이 과연 끝까지 갈까? 무사히 끝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다 은혜를 받습니다. 그들 중 나이 70쯤 되시는 분이 가끔 독창을 하면 전 교인이 다 울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가 늘 생각납니다. 그 교회의 찬양단을 늘 생각합니다. 그 교회 찬양단과 우리 찬양단을 비교하면 수적으로 절대 외소하지 않다는 겁니다. 어떤 거대한 찬양단과 비교해서도 그때 받은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어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면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이 감동하십니다. 우리 교회 성가대를 봐도 연세가 다들 높으십니다. 애 많이 쓰고 계십니다. 교회 다른 일도 많은데 여기 저기 눈치 봐가며 연습하시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섭섭한 말씀 듣는 것도 다 압니다. 그러나 그런 섭섭함과 애로를 견디면서 교회 봉사하는 겁니다. 마르다를 생각하십시오. 다 안 알아줘도 주님만은 알아주실 줄 알았는데, 주님마저도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위한 잔치를 치뤄내는 것 보십시오. 끝까지 자기 일에 헌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십시오.

다음은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3절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주님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주님 발을 닦았다고 합니다. 당시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최고급 나드 향유였습니다. 그래서 ‘순전한 나드’ 라고 했습니다. 순전한 나드란 마리아의 순전한 사랑을 뜻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몽땅 주님 발에 쏟아 부은 것은 그가 자신의 사랑을 다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 찼습니다.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진동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말로만 하지도 마시고, 가슴으로 만도 하지 마십시오. 결단하고 실천하십시오. 희생적으로 하십시오. 언제나 옥합을 깨트려 순전한 나드 향유를 주님 발에 붓는 심정으로 찬양하십시오. 찬양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내 모든 사랑을 쏟아 붓는 심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본문 5절의 가룟 유다처럼 왜 그 아까운 향유를 허비하냐고 책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낭비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룟 유다를 책망하시며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가만 두어라.’ 마태복음에서는 ‘온 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을 기념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기념비를 세운 겁니다. 오고오는 세대에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삼으신 겁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희생적인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 찬양을 부르면 이 하나님의 교회가 향기로 가득해 집니다. 우리 푸른교회 성가대도 이런 순전한 나드 향유가 부어지듯 찬양을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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