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03m: 분열과 모순(롬 7:19-8:2)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2011년 4월 3일 주일낮예배/사순절 넷째주일
본문: 롬 7:19-8:2
제목: 분열과 모순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늘 본문은 바울의 처절한 실존 고백입니다만, 이것은 우리의 아픔이요 모순이요 현실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1절 하반절도 보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절 이하입니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나머지 이제 바울이 비명을 지릅니다.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바울의 절규인데, 그러면 바울이 언제 죄 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까? 바울은 언제 이렇게 몸부림을 친 겁니까? 이때가 예수 믿기 전입니까?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이었겠지요? 놀랍게도 예수를 믿은 지 한참 지나서입니다. 바울이 언제 개종했습니까? 주후 34년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신 그 다음해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는 언제 썼습니까? 주후 57년 제3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 3년간 머물 때 썼습니다. 그러니까 개종한 지 20년도 더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갈등과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원하는 선이 아니라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은데 실제는 언제나 죄의 법을 따르며 산다고 합니다. 바울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2000년 기독교사에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괴로워하며 비명까지 지르고 있는 겁니까? 오죽하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좀 건져다오’ 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까요? 수십 년 간 담배를 하루에 한 갑씩 핀 사람이 하루아침에 담배를 끊을 수 있습니까? 온갖 금단현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다시 담배를 입에 뭅니다. 수십 년 간 술 마시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술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독에 절어 아무리 끊고 싶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죄는 마약보다 알콜보다 담배보다 더 지독합니다. 무 자르듯 할 수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죄의 길을 질주했는데, 오늘 딱 멈춰설 수 없습니다. 관성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브레이크를 밟는다 해도 그 탄력, 가속도 때문에 앞으로 밀려 나갑니다. 우리는 죄를 밥 먹듯 짓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위대한 사람도 사도가 된 지 20년이 넘도록 아직도 분열과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같은 범인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죄가 이토록 무섭습니다. 하루아침에 절대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끌려가 70년간 종살이했습니다. 그때 언어, 문화 등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주님은 그로부터 400-500년이 지나서 유대 땅에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히브리말을 쓴 게 아닙니다. 히브리말은 교육 받은 사람들이 썼고, 서민들은 아람어를 썼습니다. 바벨론 방언을 쓴 겁니다. 주님도 주로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른 비명인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도 아람어입니다. 70년간 바벨론 종살이 했던 후유증이 지독합니다. 죄는 더 무섭습니다. 그 후유증이 더 오래갑니다.
지금 바울의 비명이 바로 이런 겁니다. 아직도 자기 몸에 옛 사람의 습성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옛 삶의 버릇이 잔존한다는 겁니다. 어떤 집단에서는 예수를 믿으면서 죄를 짓는 사람은 아직 구원 못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후나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개인차는 있을 수 있으나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입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닙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회심한 사람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뵙고 주님으로부터 사도의 위임장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죄 때문에 비명을 질러도 바울만큼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우리와 똑같이 날마다 분열과 모순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본문 25절을 보면 이상한 대목이 나옵니다.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고 했던 사람이 25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합니다. 뜬금 없습니다. 느닷 없습니다. 그렇게 비명을 지르던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왜 감사한다는 겁니까? 25절 하반절을 보면 달라진 게 없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게 앞뒤가 맞습니까? 어째서 바울이 탄식이 아니라 감사한다고 했을까요? 자기는 여전히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따른다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을까요?
8장 1-2절 때문입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무리 아멘에 인색해도 이 대목에서는 반드시 아멘 하셔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도가 튼 겁니다. 20년 만에 깨달음이 온 겁니다. 이제 바울이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위대한 사도가 된 후에도 죄 때문에 절망하고 갈등했던 바울이 여기서 무릎을 치며 감사했던 것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득도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정죄함이 없고 영원히 정죄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죄의 법,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전과 다를 바 없이 죄지으며 살지만, 그러나 이제 더는 나를 죄인으로 규정할 법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법이 폐기처분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죄를 여전히 짓지만 나를 죄인으로 규정할 법이 없어진 겁니다. 사망의 법이 있어야 나를 사망으로 선고하는데 그 법이 폐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생명의 법, 성령의 법에만 저촉을 받습니다. 죄를 안 짓게 된 것 때문에 바울이 감사한 게 아닙니다. 계속 죄를 짓고 살지만 단죄할 법이 없어졌기에 바울이 감사하고 있는 겁니다.
시쳇말로 우리는 어떤 짓을 해도 나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나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이나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무릎을 치며 감사하고 있는 겁니다. 피뢰침 아래에 있으면 살인강도도 벼락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뢰침 아래에 있지 않으면 공자도 성자도 부처도 벼락을 맞습니다. 그 사람이 착하냐 악하냐가 아니라 어디 아래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죄를 여전히 짓고 살지만 십자가 아래에 있기에 더는 하나님의 심판의 벼락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십자가 아래 있는 자>는 더 이상 벼락을 맞지 않습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유대인의 집을 유월한 게 아닙니다. 그 집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이어도 그 집에 어린 양의 피가 칠해져 있지 않았다면 장자가 죽습니다. 애굽 사람의 집 문 인방에 어린 양의 피가 발려있다면 그 집의 장자는 죽지 않습니다. 얼마나 선하게 사냐 악하게 사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게 어린양의 피가 발려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내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 물어서 심판한 겁니다.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하신 말씀은 ‘왜 나를 지옥에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더는 내게 죗값을 묻지 않으시는 겁니다. 이것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우리의 구원,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을 이 세상 그 무엇도 훼손하거나 무효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 짓고 사는 것도 안 됩니다. 주님의 구원은 그만큼 완전하고 영원하며 위대합니다. 로마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아니 신구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이 로마서 8장은 바로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바울의 개가입니다. 승리요 노래요 감사의 찬양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이, 성경 볼 시간이 없으면 로마서를 보고, 그것마저 시간이 없으면 로마서 8장을 읽으십시오. 그래서 바울이 기독교의 원조요 창시자입니다. 우리는 다 바울의 후예들입니다.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보다 더 위대한 말씀은 없습니다. 단언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할 때 모든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모순, 분열, 아픔, 고통, 눈물, 이 모든 것을 결국 선으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다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번 다시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더는 괴로워하지 마시고 감사하십시오. 내가 이토록 악랄하지만 구원을 보장해 주시니 감사하다고 하셔야 합니다. 8장 33-39절을 함께 읽으며 설교를 마감합니다.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원래 주소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