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적이 없다는 것인가?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걷지 못하는 한 장애인이 있었습니다(행 3:2). 그래도 어떤 고마운 사람들이 늘 그를 성전문 어귀까지 메다 주어 구걸을 하며 연명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무슨 바람이 있다면 그저 굶지 않고 그날그날의 구복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인들 왜 한 때는 자기 운명에 저항하는 몸부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언제부턴 가는 자신의 그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지쳐 이제는 아예 숙명론자가 된 것입니다. 그 어떤 기대도 않을뿐더러 희망에 대한 부질없는 충동 따위는 우선 제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원래 숙명론이란 약자가 터득한 삶의 지혜가 아니라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보다 편리하게 부리기 위해 만든 통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도 여기에 가담하여 오랫동안 공범 노릇을 해왔습니다. 불행에 신음하고 재앙에 우는 이웃을 보고도 하나님의 섭리라거나 죗값이라며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앉혔습니다. 불교의 업보라는 설법도 똑같은 강자의 지배논리입니다. 그들은 흔히 이 숙명론을 설득하기 위해 합리적, 현실적이라는 도그마를 사용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체념이라는 독을 뿌렸습니다. 합리적이요 현실적이라는 말은 기존 질서란 곧 불가항력적이라는 위협인데 여기에 도덕과 윤리, 종교 그리고 권력이 동원되어 그게 마치 진리인양 선전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런 선전에 세뇌된 현대인들은 자기가 앉은 자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오직 이 불가항력적인 현실에 적응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설득법의 중요한 특징은 비전이나 희망은 없고 오직 현재만이 전부며, 또 기적도 없고 절망도 없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앉은뱅이가 걸으려는 희망을 품는 것은 황당한 망상이 됩니다. 기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턱없이 기적을 바라기 때문에 죄악이 됩니다. 그렇다고 그냥 드러누워 죽기를 각오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절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무래도 현재가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은 그저 남의 손에 이끌려 적당한 자리에 앉아 구걸하며 사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기적이 없다는 겁니까? 그것은 인과율만이 현실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의 거짓말입니다. 앉은뱅이를 성전 입구에다 업어다 주었던 사람들이나 성전을 드나들며 푼돈을 떨어뜨려 그를 겨우 연명하게 했던 사람들이 실은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전능하다는 신에게 예배하기 위해 성전을 들고나면서도 저 앉은뱅이는 조상의 죄 때문에 저렇게 태어났으니 영원히 앉아 있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그가 제 발로 걷거나 뛰게 되어 그들과 나란히 성전에 들어가게 될 기적 따위는 믿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까지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뜨리려고도 않았기 때문에 적선을 한 것입니다.
하기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당장 걷고 뛴다면 그것은 확실히 이날까지의 모든 질서의 아성이 무너지는 혁명적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기존 질서에 자기의 자리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결코 달가울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 우리의 모진 운명을 바꾸어 놓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이 없으면 어떡하라는 겁니까?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부활의 기적이 없었다면 어쩔뻔 했습니까? 그럼 종교의 탈을 쓴 유대교의 악당들과 자기의 권력에 거추장스럽다고 죄 없는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 살해한 빌라도의 만행이 영원한 정의가 되라는 겁니까? 기적이 없다는 말은 억울한 사람은 영원히 울고, 포로된 자는 영원히 매여 있어야 하고, 눈먼 자는 영원히 어둠 속에 있어야 하고, 눌린 자는 영원히 압제 아래 있어야 한다는 숙명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기뻐하고 해방되고 눈이 뜨이는 기적을 베푸시기 위해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실을 믿었기에 몇 닢 동전을 뿌려주는 대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며 그를 잡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부디 이 <잔인한 달> 4월에 모두가 자신의 그 모진 숙명을 털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