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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m: 율법과 복음(마 5:17-20)

2008년 4월 20일 주일낮예배
본문: 마 5:17-20
제목: 율법과 복음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율법 시대를 살고 있습니까? 복음 시대를 살고 있습니까? 복음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복음의 시대입니다. 또 하나 여쭙니다. 우리는 지금 구약시대 유대인들과는 달리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필요없습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여전히 율법이 유효합니까? 복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율법은 유효합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과거 유대인들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율법의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 시대의 유대인들은 왜 율법을 지켰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안식일, 십일조, 십계명 규정 등을 지켰습니다. 당시에는 율법의 목적이 구원이었습니다. 무조건 지켜야 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강제였습니다. 절대적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면 복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복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구원에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은혜로 구원 얻은 사실에 대한 감사이고, 둘째는 조금이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 입니다. 성화를 위해서 입니다. 천국에는 모두 거룩한 백성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율법을 실천함으로 우리의 삶이 성스러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천국에서 문화적 충격 없이 그 거룩한 세계에 잘 적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유대인과 우리에게 율법이 좀 다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강제요 계명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복음의 원조입니다. 복음의 화신입니다. 주님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심으로 율법시대가 폐막되고 복음의 새 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절 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주님이 복음의 화신이라 해서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하려고 왔다는 겁니다. 18절 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복음 시대라 해서 율법이 폐기되지 않고 여전히 유효합니다. 일점일획도 무효화 될 수 없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로, 성화에 대한 자발적인 삶의 양식으로 율법은 존중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최근 지하철 역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무료로 배포되는 일간지에 십일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대형 광고가 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온 오프 라인에서 논란이 뜨겁습니다. <한국교회개혁클럽>이라는 단체가 낸 광고입니다. 요즘의 반 기독교적 정서를 이용해서 조직적인 활동 중 하나입니다. 제가 그 광고의 전문을 가져왔습니다. 그 중 핵심 대목입니다: “십일조는 본래가 율법이며, 이스라엘과 유대인에게만 내려진 규례이지, 신약 교회에 내려진 규례가 아니다. 따라서 십일조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세례 요한때까지의 율법 시대에만 효력을 지녔다. 이 율법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동시에 종식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어리석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끝난 율법 중 하나인 십일조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한국교회는 기독교 이전 율법시대의 유물인 강요적 율법을 하루 속히 폐기해야만 한다.”

공감이 되십니까? 구구절절 맞습니까? 십일조는 율법 시대의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고 복음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은 구구절절이 율법인데 복음인 신약만 성경입니까? 그런데 왜 복음 시대를 사는 우리가 구약도 성경으로 갖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논리라면 율법인 구약도 폐기해야지 않습니까? 복음의 화신이신 주님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러 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종식되었기에 구시대의 유물인 십일조를 폐기해야 한다면, 복음의 주체이신 주님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루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거듭 말씀드리지만 율법은 복음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합니다. 다만 율법 시대의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구원의 수단,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율법은 의무요 강제였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구원에 대한 응답이요,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강제조항이 아니고 자발적인 행동 양식입니다. 감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강제가 아닙니다. 십일조 안 한다고 구원이 박탈되거나 교인자격을 상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하면 또 그만큼 복되고 그만큼 큰 은혜도 입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감사 앞에서 가장 약하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에 대해 십일조로, 감사헌금으로, 특별헌금으로 감사를 표하면 주님은 좋아하십니다. 왜냐면 주님은 돈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돈 좋아하는 것 아셨습니까? 놀랍게도 주님은 돈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돈이 필요해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질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돈 앞에서는 절대 자기를 숨길 수 없습니다. 누가 감히 자기를 돈 앞에서 숨기겠습니까? 그 사람의 적나라한 인간성이 다 드러납니다. 그 사람의 양심, 가치관, 세계관이 다 드러납니다. 그 사람의 주님에 대한 사랑, 믿음이 다 폭로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돈 앞에서는 절대 자기를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하십니다. 돈을 달라고 해 보시면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돈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수준을 알고 싶다면, 여러분의 현재의 신앙지수를 알고 싶다면,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헌금수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만큼만 헌금하고, 헌금만큼만 신앙합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사랑이,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헌금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돈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그렇습니다. 돈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하기에 우리의 중심을 시험하시기 위한 수단으로 주님은 항상 돈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돈으로 표현된 사랑만 진짜 사랑입니다. 말로만 표현된 사랑은 가짜입니다. 말로만 잘 믿는 것은 다 사기입니다. 빈 말이 아니라 돈으로 하는 감사가 진짜입니다. 말로야 무엇을 못합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율법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17절에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 왔다’고 하고 18절에서는 ‘다 이루겠다’고 하시고, 20절에서는 ‘너희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완전케 하기 위해 왔다는 것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 이루겠다고 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의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율법은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추구하지 않고, 형식주의, 문자주의, 교조주의 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화석화되어 빈껍데기만 남은 외식주의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을 고발할 때 겉과 속이 다른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위선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지키되 유대인들의 수준을 반드시 넘어서야 합니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형식주의, 문자주의, 외식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율법적인 의로는 천국갈 수 없습니다. 문자나 법조항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 본질을 추구하는 실천이어야 그것이 참된 의요, 복음적인 의입니다.

그러면 다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무엇입니까? 구약 율법에 나오는 헌금 제도인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헌금법입니다. 그 핵심은 수입의 1/10은 하나님 것이니,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소득의 1/10은 하나님께 돌리고, 나는 9/10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강요한 십일조 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법에 철저했습니다. 마당 구석에 심어 둔 작은 텃밭의 소채의 1/10도 바쳤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그들의 행위가 완전치 않다고 하시고 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십일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주님이 그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했겠습니까? 더 나은 십일조를 바쳐야 천국간다고 하셨겠습니까? 그들이 바친 십일조는 진정한 십일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10을 칼처럼 떼어 바치는 것은 율법적인 십일조입니다. 본래의 십일조는 내 소득, 내 수입, 내 토지의 소산 중 1/10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10/10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실제 십일조를 바치며 실천적으로 고백하는 행위가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9/10은 내 것이 아니라 이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단지 1/10을 떼어 바치면서 실제로 10/10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1/10만 하나님 것이고 9/10은 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십일조의 근본정신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생명, 내 심장,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부차적으로 고백하는 행위로 1/10을 바치는 것입니다. 9/10는 제가 대기시켜 놓고 있습니다. 언제든 필요하면 바치겠다는 겁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청지기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다만 그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1/10만 바치고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저히 반 십일조 정신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랬기 때문에 주님이 천국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십일조에 대한 이해가 틀렸다는 겁니다. 율법은 십일조가 1/10 이지만, 복음은 10/10입니다.

율법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십일조 보다 더 무서운 계명입니다. 안식일 성수 개념 곧 주일 성수 개념이 한 주간 7일 중 엿새는 내 자신을 위해 살고, 하루는 칼처럼 떼어 바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틀린 것입니다. 엿새는 내 뜻대로 살고, 7일 중 하루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주일 성수가 아닙니다. 이레 중 이레가 하나님의 시간이요 하나님의 날입니다. 이 사실을 한 주간의 하루를 온전히 주님께 떼어 바치면서 몸으로 고백하는 날이 주일성수입니다. 한 주간의 하루가 하나님의 날이기에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주간 전체가 하나님의 날이라는 사실을 한 주간 중 하루를 떼어 바치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차이가 큽니까. 유대인들의 안식일 성수 개념은 7일 중 하루만 하나님의 날로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주님이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범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사서 십자가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응급환자도 아닌데 안식일날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미움을 샀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최초 동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안식일 개념에 대한 도전이요 비판이요 고발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면에서 안식일을 파기함으로써 모든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만 안식일이 아니고, 7일이 다 안식일이라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성소가 아니라, 모든 곳이 성소라는 겁니다. 왜 안식일만 교회 와서 거룩하게 사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회칠한 무덤이라는 겁니다. 모든 삶의 현장이 다 성소입니다. 모든 날이 성일이고 안식일이며 주일입니다. 주님의 시간이요 주님의 날입니다. 이 사실을 주일을 성수함으로써 내 몸으로 고백하는 것이 주일성수의 개념입니다.

부디 율법과 복음의 함수관계를 깊이 이해하시고, 율법의 문자조항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 근본정신을 이 시대에 새롭게 해석해서 여러분의 삶에 적용함으로 여러분의 삶이 성화되고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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