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0m: 염려하지 말라!(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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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0일 주일낮예배
본문: 마 6:25-34
제목: 염려하지 말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며 힘이 되는 말씀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말씀만큼 문제가 많은 말씀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염려 없이 자기의 인생을 책임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내일을 위한 설계도 불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깁니까? 우리는 지금도 구조악 속에서 모순투성이 속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염려의 불가피성을 강변한다해도 여전히 염려는 백해무익이요 내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오늘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은 염려의 비생산성을 지적하셨습니다.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 비해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사람들에게 신장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무리 염려한다 해도 키가 더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키가 큰 분들은 주님의 이런 말씀이 감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이나 키가 작은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에 공감을 느낍니다. 숱한 염려와 고민에도 불구하고 저의 키는 더 자라지 않습니다. 저를 보시면 염려의 비생산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염려한다고 키가 더 자라지 않습니다.
주님은 염려가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비신앙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진리입니다. 염려는 불신앙의 산물입니다.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은 왜 염려를 안 할까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아이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엄마 아빠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를 엄마 아빠가 다 해결해준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 아빠가 있는데도 그 아이가 염려한다면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주님을 못 믿는 겁니다. 주님이 이렇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그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의식주 문제로 노심초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며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염려의 실체를 주님이 꿰뚫어 보신 겁니다.
그래서 내리시는 주님의 처방은 내 삶의 근거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라고 합니다. 왜 주님이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의 능력이나 자질을 보라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생존의 법칙을 보라는 겁니다. 삶의 원리, 존재의 근거를 보라는 겁니다. 공중의 새가 거저 그렇게 살아가며, 들의 백합화가 거저 아름다움을 뽐내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먹이고 입히시는 겁니다. 심지도 거두지도 길쌈도 안 하지면, 저 날아가는 새와 들의 백합화는 날마다 염려하며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돌보신 겁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미물의 새 한 마리도 주님이 완벽히 먹이고 돌보시는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완벽하게 입히시는데, 그것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하신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더욱 잘 돌보고 계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이 사실을 새와 백합화를 보며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 나오는 공중의 새는 독수리 같은 게 아닙니다. 주님이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번역 상 참새이지 그저 작은 새입니다. 하나님도 작은 새 한 마리보다 너희를 더욱 잘 돌보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반 푼에 팔리는 새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에게는 하나님이 그냥 창조주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도 그런 새나 백합은 자연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왜 아버지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신들입니다. 우리는 새와 백합과는 다릅니다. 단순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새와 백합화도 이토록 세심히 돌보거늘 나의 분신들인 너희일까 보냐, 너희에 대해 무책임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왜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아십니까? 사생자입니까? 왜 엄마 아빠를 곁에 두고 의식주 문제에 노심초사하십니까? 엄연히 아버지가 계신데, 내 머리터럭 한 올까지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왜 고민하고 고뇌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아직도 내 인생을 내가 요리하려고 합니다. 내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작은 자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다 의탁하지 못하고 여전히 모든 짐을 내가 지고 지금도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절대 내 재주, 노력으로 감당하려고 하는 한, 염려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내 운명의 절대적인 주권자라는 사실을 용납하심시오. 내가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봤자 사태만 점점 더 악화됩니다. 내 인생만 점점 더 꼬일 뿐입니다. 하루속히 모든 문제를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짐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내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의식주가 먼저가 아닙니다.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언제나 이게 문제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삶의 수순은 분명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먼저인데, 우리는 자꾸만 의식주가 먼저라고 우기는 겁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무슨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냐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래서 우리가 밤낮 염려의 덜미에 잡혀 산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의식주를 우선으로 하는 우리의 삶의 행태에 대해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 아버지가 이 모든 게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신다고 하십니다. 의식주를 우선순위로 두는 삶은 이방인의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게 먼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세상 사람의 논리와 방식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니라 의식주를 먼저 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뒷전으로 밀립니다. 이렇게 사는 한 절대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 거꾸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삶의 온갖 고뇌가 옵니다. 이제는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좇아야 할 최고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염려하다 죽을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야 잘 먹고 잘 사는 게 전부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말로 포장해도 그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선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이 다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의식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는 자의 역설적인 삶의 비결이요 방식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근본적으로 염려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으로 자족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염려로부터 놓여난다고 하십니다. 본문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새나 꽃들은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새나 꽃들은 곡간이 없고, 통장도 없습니다. 그날그날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루분의 만나로 살았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당장 구더기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절대 만족하지 못합니다. 창고를 만들어 잔뜩 쌓아 놓아야 비로소 만족합니다. 우리는 탐욕의 화신들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 없어 불평하는 게 아닙니다. 가진 것 중에도 더 많이 쌓아 놓지 못해서 늘 불평불만입니다. 이게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원래 기독교는 가난이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무소유, 청빈입니다. 주님이 그랬고, 바울, 어거스틴, 중세의 숱한 성자가 다 거지들이었습니다. 정말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난이 절대 복이 아니라 최고의 불행이요 저주입니다. 기독교가 변질되어서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걸 좇다가 다 망합니다. 자제하십시오. 염려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족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이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탐욕에 절어 사는 여러분의 심령을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거칠고 황량합니까? 얼만 강퍅합니까? 채워도 차지 않는 탐욕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어느 부자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텐데 그러면 쌓아놓은 저 많은 부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자족하십시오. 필요 이상으로 이미 많이 가지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방식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야 염려로부터 하루라도 자유하시다가 죽습니다. 특히 올해는 염려가 아니라 믿음으로, 탐욕과 불평이 아니라 감사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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