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0123m: 달리다굼(막 5:21-43)

2011년 1월 23일 주일낮예배
본문: 막 5:21-43
제목: 달리다굼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어느 날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주님 앞에 나와 병들어 죽어가는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 의하면 그 딸은 회당장의 외동딸이었고, 오늘 본문을 보면 나이가 12살 소녀였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딸을 고치려고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을 했으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처음에는 병든 딸을 고치려 나왔는데, 나중에는 죽은 딸을 되살렸습니다. ‘달리다굼’하는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소녀가 되살아나 걸어다닌 겁니다.

그러면 이런 극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과정을 보겠습니다. 우선 야이로 라는 사람이 자신의 신분과 자존심, 체면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당시 야이로의 신분은 회당장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마태복음에 의하면 관리라고 합니다. 관료의 원어적인 뜻은 지배자라는 말입니다. 회당장이면 당시 사회의 지도층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고, 지방에는 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8명의 장로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을 회당장으로 추대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당시 회당장이라고 하면 지방자치단체장입니다. 회당은 성전의 기능과 교육기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회당장은 백성의 종교지도자요 교육가요 그 지방의 원로였습니다. 그러니 그 명예나 권위, 지위에 있어 회당장은 그 사회의 지배계급에 속했습니다. 특히 회당장은 장로 중에서도 유대교에 철저하고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 회당장이 되었기에 대개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거나 서기관이 추대 되었습니다. 야이로가 바로 이런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러니 야이로가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결단이었습니다. 이때는 주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을 때였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쪽 손이 불구가 된 사람을 고쳐준 사건 때문에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사고, 유대인들은 주님을 해치기 위해 모의하던 때입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종교지도자들이 정치지도자들고 만나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수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분위기인데 회당장인 야이로가 공개적으로 주님께 나왔을 뿐만 아니라,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간곡히 구했습니다(22-23). 마태복음에는 엎드려 절했다고 합니다. 유대인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은 단순한 예의를 넘어서서 예배와 경배를 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백성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회당장 야이로가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을 했겠습니까? 과격한 사람들은 돌까지 던졌을지 모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이라는 지위도, 남의 이목도, 체면도 다 접고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렸습니다. 

이런 사람이 은혜를 입습니다. 바울도 보십시오. 그 현란한 자기의 모든 신분과 이력을 초개처럼, 분토처럼 버렸습니다. 그래서 남다른 은혜를 입은 겁니다. 회당장이라는 지위,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는 학벌도 주님 앞에 나올 때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까지 사회의 지위와 신분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사장이지 교회에서는 더는 사장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는 우리가 다 똑같습니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귀하고 천한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절대 주름을 잡으면 안 됩니다. 주님보다 더 높고 강한 사람, 많이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를 교회에 나와 기어이 관철하고자 하는 사람은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야이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병든 딸을 구하고 싶으십니까? 정말 죽어가는 외동딸을 살리고 싶으십니까? 야이로처럼 하십시오. 모든 것을 접어두고 주님 발앞에 겸손히 엎드리십시오. 그래야 은혜를 입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야이로는 중도에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야이로는 이제 주님을 모시고 가고 있습니다. 24절입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야이로는 주님이 함께 가신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내 딸이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본문 22절을 보면 갑자기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끼어듭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이 밀고 당기고 하는 통에 발걸음이 느려 속이 타는데, 주님이 그 여인을 붙잡고 지체하고 계십니다. 지금 자기 딸은 초를 다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앞으로 나가시지 않고 늑장을 부리십니다. 이때 야이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이 야속하고, 갑자기 뛰어든 혈루증 앓는 여인이 미웠을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길에 여러 변수가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주님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 긴장하게 하고 속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동행을 훼방하고 지체시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결국은 야이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실제 벌어졌습니다. 주님이 혈루증 앓던 여인을 잡고 지체하는 동안 집에서 기별이 오기를 딸이 죽었다는 겁니다. 야이로는 하늘이 무너졌을 겁니다.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털석 주저 앉으려고 하는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야이로가 충격을 받고 쓰러지지 못하도록 주님이 단속하신 겁니다. 사실 우리는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손을 써도 아직 살아있을 때이지 죽은 다음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야이로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그런 상식과 판단을 부정하십니다. 딸이 죽었다는데도 절망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무너지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분명 주님과 함께 가고 있는데도 겪을 것 다 겪습니다. 주님과 함께 간다고 모든 불행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아니 때로는 주님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구원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감격을 배로 느끼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본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병든 딸을 고쳐주시는 것보다 죽은 딸을 살리는 게 더 극적입니다. 나사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나사로가 병이 들자,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께 기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특별한 이유 없이 계시던 곳에 더 머무르셨습니다. 이틀을 더 지체하신 겁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자 비로소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하시며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시신이 썩어 냄새나는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며 그를 불러내십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불행 앞에서 무너지면 안 됩니다. 최악이라고 쉽게 포기하면 어리석습니다. 주님이 여전히 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가고 계십니다. 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귀를 열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야이로를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혼미해진 정신을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주님에 대한 야이로의 신뢰를 남달랐습니다. 23절입니다.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처음부터 야이로는 주님이 딸에게 오셔서 손을 얹으시면 딸이 나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서 혈루증 앓는 여인과 지체하시고, 결국 딸이 죽었으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신뢰합니다. 정작 집에 오자 난리가 났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딸이 죽은 게 아니라 잔다고 하자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비웃습니다. 그런데도 야이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믿기만 하라는 말씀에 대한 신뢰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얼마나 분위기에, 주위 환경에 쉽게 휘둘립니까? 너무도 허무하게 부화뇌동합니다. 심지가 굳지 못하고 믿음의 줏대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그때그때 변하는 세상과 환경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보다는 주변 사람의 소리에 예민해서 그렇습니다. 거센 세상파도를 보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바다에 빠집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위협적인 파도를 보는 순간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세상 풍랑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처럼 성난 파도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작년 연말부터 우리 주위에서 충격적인 사건들이 터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회의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잃지 마십시오. 믿음은 초지일관해야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거기에 죽은 딸을 되살리는 기적이 있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기별이 와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체념하고 울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달리다굼’ 하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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