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0116m: 2011 경계령(삿 17:5-13) 여전도회 주일

2011년 1월 16일 주일낮예배/여전도회 주일
본문: 삿 17:5-13
제목: 2011 경계령

[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8]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1]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지난 주일에는 신사동에 있는 대표적인 엘리트 교회 소망교회에서 담임목사를 폭행한 사건을 주제로 칼럼을 썼는데,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분당중앙교회 사건으로 설교를 하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그 교회에 대해 이런 저런 소식을 듣기는 했으나 가히 최악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신흥 대 교회의 곪은 문제가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위태위태한 교회가 더 있습니다. 조만간 여러 교회가 더욱 충격적인 소리를 내며 무너질 것입니다.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변질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무셨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 말씀하신 그대로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다 주님의 작품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입니다. 그래서 이것 아니다 싶으면 주님이 문을 닫습니다. 오늘은 2011년 새해 우리가 피하고 경계해야 할 몇 가지 부정적인 신앙행태를 짚어 보겠습니다. 이것만큼은 우리가 염두에 두고 경계하자는 겁니다.

신년 벽두에 주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경계령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실용주의 입니다. 오늘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얘기는 사사시대 때 에브라임 살고 있던 미가라는 사람의 얘기입니다. 이 사람은 아예 자기 집 마당에 신당을 세우고 자기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게 과연 옳은 것인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내게 편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사사기 18장 31절을 보면 당시 하나님의 집은 실로에 있었습니다. 실로는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에브라임에서 먼 곳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오가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하나님의 집을 두고도 더 가까운 곳을 찾다가 아예 자기 집 마당에 신당을 세우고 레위인도 아닌데 자기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은 겁니다.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이 미가뿐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 소견대로 했다고 합니다. 제 입맛대로 산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제 편리한대로 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더 합니다. 요즘도 실용주의, 편의주의, 이기주의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절대 양보나 희생, 불편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교회 내에서 십자가니 고난이니 희생이니 하는 것은 공허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주님의 뜻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면 불평도 불이익도 용납하고 희생도 감수할 수 있지만, 자기의 편의에 의해서만 신앙생활을 하기에 요즘은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교회가 멀어도 불편해서 싫고, 교회가 작아도 구차해서 싫습니다. 요즘은 교회 선택의 절대 기준이 실용과 편의주의입니다. 누가 목회를 하고, 어느 교단이며, 얼마나 충실한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얼마나 나의 편의에 도움이 되는가만 따집니다. 편리하고 쾌적하면 됩니다. 신앙생활의 참된 원칙은 실용이나 편의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요,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이 아니기에 틀린 겁니다. 신앙생활은 실리나 계산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희생하며 손해 보며 양보하며, 십자가를 지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설교하면 다 달아납니다. 이것, 어쩌면 좋습니까? 다 엉터리요 가짜인데 어쩌면 좋습니까? 이게 대세니까 나도 따라가야 합니까? 그러면 시간문제입니다. 그 사람도 망합니다. 주님은 지독한 이기주의를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올해는 제 편리한대로, 자기 소견대로 신앙생활하지 마시고,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십시오. 실용적인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희생하며 헌신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신앙생활 하십시오. 

다음은 기복주의 입니다. 구복주의입니다. 기복신앙, 구복신앙이 무엇입니까? 오로지 현세적 복만을 기도하는 겁니다. 물질적 축복만을 구하는 게 구복이요 기복주의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많은 현세적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물질적인 복을 누리며 사는 게 하나의 권리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거나 궁극적인 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효과입니다. 신앙의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다들 젯밥에만 관심을 둡니다. 무속이나 재래 종교는 세속적 축복이 전부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안수 떠 놓고 빌고, 굿을 하고, 점을 보고, 차례를 지내는 겁니다. 물질적인 복을 누리자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에도 구복적인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본질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보다는 영적이고 내세적인 복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미가는 현세적인 복만 추구했습니다. 본문 사사기 17장 마지막절입니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지금까지는 자기 아들이 제사장 노릇을 했지만 이제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삼았으니 하나님이 더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보다는 축복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미가는 특히 돈에 대한 탐욕이 대단했습니다. 왜냐하면 17장 1절 이하를 보면 미가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재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어머니처럼 재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 마당에 신당을 짓고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고, 또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채용한 겁니다. 하여간 하나님의 축복을 독식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 제사장에게 축복기도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까? 돈만 있으면 정말 우리가 행복해 집니까? 도대체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 적이 있습니까? 돈 때문에 부모자식 간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이혼도 합니다. 가난하다고 망하진 않습니다. 오순도순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평화롭게 살던 시골 마을에 개발 바람이 불어 보십시오. 보상금 문제가 불거지면 풍비박산이 납니다. 기억하십니까? 일본에서 어느 사람이 1억엔을 대나무 밭에 버렸습니다. 그 사람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그 큰돈을 버렸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돈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사기치고 자살하는 걸 보고 인간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돈은 진정한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꾸만 조르니까 하나님이 가끔식 돈을 주시기도 하지만, 돈은 축복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물질 문명이 발달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더 행복해 졌습니까? 오히려 자동차와 비행기 때문에 더 빨리 죽고,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일수록 자살하고, 정신병자가 많습니다. 물질지수와 자살지수는 정비례합니다. 우리가 사는 분당만 해도 대표적으로 닭장 밀집지역 아닙니까.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정신병자가 되어 가는데 이게 무슨 축복입니까? 대놓고 말씀해서 죄송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도, 사랑의교회도, 분당중앙교회도 다 돈 때문입니다. 문제는 돈 입니다. 다 돈 때문에 타락한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연봉 6억을 받고 타락하지 않을 목사가 있습니까? 저도 아마 6억을 받으면 더욱 타락 했을 겁니다. 다 타락하는데 우리는 왜 타락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도덕성이 남달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가난해서 타락하지 않는 겁니다. 돈의 속성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거지같이 사는 게 행복한 겁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돈 없으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것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악악거리며 돈 벌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굶기지 않고 입히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겁니다. 주님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마지막으로 형식주의, 외식주의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미가의 신앙을 보십시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얼마나 그럴듯 하고 열심도 있고 구색도 갖췄습니까? 자기 집 앞에 교회도 짓고, 목회자도 자비로 초빙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날마다 그에게 안수를 받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게 다 형식과 외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작 있어야 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내용,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를 드나든다고 신자는 아닙니다.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그런 절차나 요식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요즘은 태반이 무늬만 신자입니다. 빛깔만 그럴듯 합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겉사람보다는 속사람을 주목하십니다. 형식이나 외식보다는 내용이나 열매를 주목하십니다. 주님께 절대 잎사귀는 안 통합니다. 주님 당시의 예루살렘 사람도 다 그랬습니다. 잘 믿고 의로운 체 했을 뿐이지 실제 그런 믿음은 없었습니다. 금식을 하면서 슬픈 표정을 짓고, 기도할 때도 은밀히 하지 않고 시장통에서 떠들며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겁니다. 너희는 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겁니다.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등만으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 보십시오. 등만 들고 있었습니다. 형식만 들고 있었습니다. 다 망했습니다. 다 어두운 바깥에 내어쫓김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 가두의 무성한 잎사귀만 있던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의 모습을 교훈하신 겁니다. 

본문의 미가는 결국 다 망합니다. 제사장도 신당의 기물도 다 날아갑니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필연의 결과입니다. 누가 주님을 속이겠습니까? 주일날 한 시간 예배의식에 참석한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신앙의 내공을 쌓으십시오.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형식주의 외식주의에 대한 주님의 분노를 기억하십시오. 정말 올해 만큼은 우리가 다 형식주의가 아니라 참된 내용과 내실을 추구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십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원래 주소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