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09m: 드보라(삿 4:1-10) 제직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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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년 1월 9일 주일낮예배/제직주일
본문; 삿 4:1-10
제목: 드보라
[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하는 신약성경은 어디입니까?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왜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합니까? 히브리서 11장은 1절부터 믿음의 정의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열거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명예의 전당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32절을 보면, 구약시대의 사사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사무엘 같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기드온, 입다, 사무엘 같은 사람은 충분히 위인에 속합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합니다. 삼손까지도 이해가 됩니다. 삼손도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영웅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는 바락이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바락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홍일점 사사였던 드보라의 부관이었습니다. 드보라 치맛자락 붙잡고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작 드보라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못 올리고 바락이 올라갔습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드보라가 여장부였는데 부관이었던 바락의 이름이 올라간 겁니다. 브라질에서는 룰라 대통령의 후임으로 여성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반정부 게릴라 단체의 여전사였던 호세프가 취임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박근혜 씨가 차기 대권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요즘도 여성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옛날 여성에게는 아무런 주권을 보장하지 않았던 철저히 남성가부장적 중심의 고대 이스라엘에서 드보라가 남성 중심의 군대를 지휘해 이스라엘 전사에 길이 빛날 대승을 거둔 것은 놀라운 일이고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 왕 야빈에게 무려 20년 동안 착취를 당해왔습니다. 특히 그에게는 명장 시스라가 있었습니다. 그의 군대는 철병거 900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요즘식으로는 장갑차 900대입니다. 막강한 화력아니겠습니까. 이런 막강한 전력을 갖춘 적을 상대로 주부 출신의 드보라가 싸워 이겼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모한 전쟁이었는데 시스라의 군대를 궤멸시키고 승리를 쟁취한 겁니다.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 평화를 찾은 겁니다. 그로부터 무려 이스라엘이 40년간 태평성대를 누린 겁니다. 그러니 드보라야 말로 얼마나 탁월한 지도자입니까.
우리의 편견 가운데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서너 살 때 이미 성경을 다 알고, 일곱 살 때 이미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 정도 되어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민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해학적이며 역설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잘 나면 얼마나 잘 났겠습니까?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 잘난 사람 찾아 쓰시고, 유능한 사람 불러 쓰시겠습니까? 편견을 버리십시오. 선입견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강자보다 약자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많이 가진 자보다 갖지 못한 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보다 여자를 통해 일을 많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자보다 여성 신도가 더 일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도 다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여성이 시간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해야 일의 결과가 잘난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동에 큰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안동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는 골짜기 출신입니다. 정규 신학도 나온 분이 아닙니다. 안동에서 성서신학원을 나와 장신대도 별과를 통해 목사안수를 받으셨습니다. 농촌의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다 실패하고, 서울로 와서도 목회에 실패했습니다. 그런 과정에 본인도 자식도 다 폐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저 교회가 어떻게 저렇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어떤 이는 새벽기도가 비결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는 목사님이 워낙 시골 사람이어서 객지 생활하는 서울 사람의 정서에 맞아 떨어져서 그렇다고 봅니다. 어떤 이는 교회 이름이 좋아서 명성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다 틀린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 일하신 이유는 그분이 목회자 중 가장 가진 게 없었고 무능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그러면 바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왜 택하셔서 위대하게 쓰셨습니까? 바울은 참 좋은 배경의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얘기일 뿐입니다. 정작 바울 자신은 만삭되어 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죄인이 아니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훼방자고 핍박자고 포악자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울의 간증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능한 바울을 쓰신 게 아닙니다. 죄인 중 괴수 바울, 덜 떨어진 바울, 그야말로 훼방자요 포악자였던 바울을 쓰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가진 게 없는데 왜 하나님이 제대로 쓰시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못났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안 쓰시는 이유는 우리가 못 났음에도 불구하고 잘 났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못 났음을 인정했기에 쓰신 겁니다. 우리는 제 잘난 맛에 살고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쓰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남성인 바락이 아니라 여성인 드보라를 쓰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권능과 드보라의 연약함을 대비하여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 위대한 일을 드보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 드보라의 이름마저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안올리신 겁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를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직도 제대로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게 없어서도, 못 배워서도 아닙니다. 정 반대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주님이 쓰시기에 너무 잘 났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리시기에는 우리가 너무 유능합니다. 우리를 최전방에 내세워 군대를 지휘하게 하시기 에는 우리가 아직 너무 교만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도 저 만큼은 아직 그런 인물이 못 됩니다 해야 하나님이 쓰십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죄인이나 저는 죄인의 괴수입니다고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정상적으로 태어났으나 나는 만삭되어 나지 못했다고 고백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쓰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누가 내게 못났다고 하면 가장 못 참습니다. 절대 용납하지 못합니다. 하여간 우리는 이게 가장 안 됩니다. 틀림없이 못나서 못났다고 해도 그걸 용납 못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채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절대 잘난 사람 안 쓰십니다. 못난 사람을 쓰시면서 잘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일을 못난 사람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동에 있는 큰 교회를 보며 그 목사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드보라가 어떻게 민족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 승리하고 주어진 사사의 직무를 잘 수행했는지 보겠습니다. 우선 그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6절 하반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어려운 시대를 살던 평범한 한 여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나님께 쓰일 수 있습니다. 남성들도 꼼짝 못하고 20년간 비굴한 현실에 여성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잘 나서도 재주가 많아서도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사시대 때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는 겁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는 우리의 영성이 너무 탁합니다. 영혼이 투명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도 부단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때가 너무 많이 묻어있습니다. 성경화 집사님이 요즘 하나님의 음성을 자주 듣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생생히 하나님의 육성을 귀로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기도할 때, 성경 볼 때, 설교 들을 때, 예배드릴 때 들을 수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기적이고 인색하고 비겁한 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관대해지고, 너그러워지고, 용기충천해집니다. 부디 올해는 우리 모든 제직과 성도들이 드보라처럼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두 드보라의 후예로 거듭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드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7절입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원수를 여자인 자기 손에 넘겨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녀는 무조건 믿었습니다. 이성으로 상식으로 저울질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내게 벅차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신뢰해야 합니다. 무조건 용납해야 합니다. 그 말씀 앞에서 무조건 아멘 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주님이 나사로의 죽음으로 울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믿으면 보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이 순서를 바꾸려고 합니다. 보면 믿겠다고 합니다. 이뤄지면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일단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믿겠다고 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그때 일하겠다고 합니다. 좋은 결과가 나타나면 그때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믿고,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의 영광을 보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으니까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일단 복을 주시면 그때 바치겠다고 합니다. 일단 이 일을 이뤄주시면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현실보다 먼저 패배하고 더 빨리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실패를 예감하고 실패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독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패배적인 사람은 승리하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정서와 암시 그대로 망합니다. 우리 제직과 성도들은 드보라처럼 주님 말씀에 아멘 하십시다. 승리를 확신합시다. 말씀에 순종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믿으면 주님이 새 일을 이루십니다. 믿으면 우리에게 태산처럼 보이는 2015프로젝트도 성취됩니다.
마지막으로 드보라에게는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드보라는 동역자를 잘 규합하고 독려했습니다. 부관이었던 바락을 보십시오. 사실 바락같이 허약한 남자도 없습니다. 드보라가 바락을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함께 나가 싸우자고 하니 바락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8절입니다.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남자 망신 혼자 다 시키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일어났는데, 남성인 바락은 드보라를 믿고 드보라가 가야 자기도 가겠다고 합니다. 자기는 드보라의 치맛자락 붙잡고 가겠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드보라는 이런 허약한 사람을 달래며 이렇게 말합니다. 9절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리고 전쟁에 함께 나가 싸우는데 그 전쟁터에 나가서도 드보라는 바락과 남성 장병들을 독려합니다. 14절입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드보라가 계속 바락을 격려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여러분,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동역을 잘 해야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올해의 사역도, 수년 내에 이루어야 할 2015 프로젝트도 무엇보다 제직끼리, 성도 간에 동역이 잘 이뤄져야 합니다. 초대 교회처럼 성도 간에 유무상통하며, 서로 짐을 나눠져야 합니다. 동역의 소중함과 절실함을 깊이 인식하십시다. 누구도 방관자나 열외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 주체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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