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5m: 야곱의 모험(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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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5일 주일낮예배/대강절 둘째주일
본문: 창 25:27-34
제목: 야곱의 모험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본문의 주인공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란 뜻입니다. 결국 야곱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합니다. 허기져 이성을 잃은 형을 등쳐 장자권을 빼앗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장자에게 내리는 최후 축복기도를 훔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외삼촌의 두 딸과 여종을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나중에는 외삼촌의 재산 대부분을 야곱이 차지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축복보다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야곱인데, 세상에서 야곱보다 많은 복을 누린 사람은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보십시오. 원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차남인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겁니다. 어떻게 이런 파격이 가능했을까요? 또 새 이름도 주셨습니다. 사기꾼이란 뜻의 야곱이란 이름 대신에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 이라는 새 이름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야곱의 새 이름으로 국호를 삼았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원래는 한 민족의 국호가 아니라 개인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통 나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기적의 민족입니다.
그뿐입니까?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성씨가 250개인데, 그중 90개 성씨가 99%를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은 12계파입니다. 12지파의 시조는 야곱의 12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야곱의 직계들입니다. 이렇게 나라의 이름도, 민족 공동체의 원조도 다 야곱입니다. 야곱이야말로 아브라함 이상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야비하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인륜을 범한 사람이 저주가 아니라 전무후무한 복을 받았습니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그 복의 비밀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본문 33절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운명적으로 장자권과는 야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숙명에 승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형의 장자권을 빼앗을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야곱이 장자권을 높이 평가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동생이 형의 장자권을 가로챌 생각을 합니까? 그저 부러워하고 차남 된 자기 처지를 비관했으면 했지, 어떻게 형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을 생각을 합니까? 그만큼 야곱은 장자권에 목을 맨 사람입니다. 그는 장자권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왜 야곱은 장자권에 집착했을까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장자를 통해 계승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바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영적인 주자라는 사실을 야곱은 알았습니다. 야곱은 일찍부터 장자직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인식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냥에서 에서가 허기져서 돌아오자 마침 죽을 쑤던 야곱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안을 합니다. 장자권을 내게 넘기면 이 팥죽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에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32절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너무도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그때 야곱이 그러면 맹세하라고 합니다. 다시 찾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하자, 에서가 맹세합니다. 그때 야곱이 형에게 팥죽을 건넵니다. 야곱은 자기의 목숨을 걸만큼 소중하게 생각한 장자권인데 에서는 배고프다고 팥죽 한 그릇에 팔만큼 하찮은 게 장자권이었습니다. 당장 내 배를 불릴 팥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34절 하반절입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한마디로 우습게 여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서를 버리시고 파격적으로 차남인 야곱을 택하신 겁니다. 에서의 하나님이심을 포기하고 차남인 야곱의 하나님이 되기로 한 겁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통해 당신의 복을 계승한 겁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얼마든지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든 무조건 목적만 이루면 된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정당화되어도 잘못된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야곱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습니까?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자 한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한 살인적인 집념이 그의 모든 도덕적 결함을 상대화시킵니다. 보통의 예라면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는 극단한 케이스입니다. 장자가 누릴 하나님의 복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겁니다. 유사 이래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 복에 대한 집념이 그의 인간적 한계와 도덕적인 모순을 다 상대화시킨 겁니다. 장자권에 대한 야곱의 무서운 집념이 야비하고도 모순된 그의 수단과 방법을 압도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탓하시기보다는 두 손을 드신 겁니다. 항복을 선언하신 겁니다. 한마디로 감복하신 겁니다. 에서에게는 실망하셨고 야곱에게는 감탄을 금치 못하신 겁니다. 그래서 원칙을 다 무시하고 야곱에게 복을 주신 겁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장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자가 된 것은 우리가 장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을 가볍게 여겨서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면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의 신자 된 지위, 하나님의 자녀 된 지위를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배고파 죽겠는데 무슨 예수냐, 신앙이냐 하지 마십시오. 돈 벌어야 하는데 무슨 주일성수냐고 하지 마십시오.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빠집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이 신분과 지위를 내가 지키겠다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복의 유업이 계승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긴 사람입니다. 첫째는 장자의 지위와 신분을 소중하게 여겼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창세기 27장 18-19절입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야곱이 형 에서로 가장하고 들어가서 나이 많아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아비가 장자에게 내리는 마지막 축복을 가로채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비가 죽기 전에 내리는 마지막 기도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 최후의 축도로 하나님의 복이 장자에게 대물림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가 대단히 중요하고 결정적입니다. 우리가 예배 마칠 때 축도합니다. 축도받기 전에 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예배의 축도는 이런 성서적 전통이 있습니다. 축도할 때 복이 내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나는 축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축도까지 받고 나가십시오. 야곱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최후의 축도를 받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 이삭의 축도를 가로채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모험을 야곱이 합니다. 염소를 잡아 그 염소의 가죽을 팔에다 감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눈먼 아버지가 만져보니 털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삭이 속아서 에서에게 내릴 장자의 복을 야곱에게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강도짓입니다. 그러니까 강도짓을 하고 눈먼 아버지를 철저히 속이더라도 하나님의 복을 내가 따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할 말을 잊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복을 야곱이 이렇게까지 평가한 겁니다. 저주를 받을 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행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복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무서운 야곱의 집념입니다. 이런 것이 그의 모든 도덕적 결함을 무색하게 만든 겁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가치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의 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희생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극단적으로 저주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실제로 야곱은 그랬습니다. 27장 1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복에 대한 집념이 저주의 상황을 뛰어넘은 겁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면 저주도 좋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런 야곱의 집념의 믿음에 하나님이 감복하셨습니다. 오늘은 2015 프로젝트 주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 약속하신 복의 비전입니다. 우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죽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가기 전에 우리도 한 건은 해야겠다는 것이 비전 2015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도 작은 보람을 안고 주님 앞에 가야 얼굴을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디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허락하신 복의 유업, 비전을 소중하게 여깁시다. 놓치지 마십시다. 야곱처럼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관철하십시다. 그래서 한 건은 하고 주님께 가십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드립니다. 야곱은 기도를 소중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28장 10절 이하를 보면 야곱이 베델에서 노숙하다 베고 자던 돌을 세워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창세기 34장에 보면 귀향길에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씨름하며 기도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성경에는 기도의 거장들이 나옵니다만 얍복 강가에서 기도하는 야곱은 정말 살인적인 기도의 거장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허벅지를 내리쳐 뼈가 부러져도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누구나 기도에 승부를 걸어야 성공하고 복을 받습니다. 누구든 야곱처럼 투쟁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을 이깁니다. 천하장사도 세 살짜리 자기 아들하고 씨름하면 집니다. 하나님이 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져주십니다. 야곱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비상한 각오로 도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밤새도록 하나님과 겨루면 새벽에는 하나님이 져 주십니다. 그리고 새 이름도 주십니다. 우리의 비전을 위한 프로젝트의 마지막 카드는 기도입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항복을 받아내야 합니다. 야곱처럼 허벅지 관절이 골절되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지는 집요한 기도가 우리의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 것입니다.
야곱은 정말 복 받을 만한 사람아닙니까? 그는 가만히 앉아 복이 굴러오기를 기다린 사람이 아닙니다. 저주를 무릅쓰고 결단하고 도박한 사람입니다. 천국을 쳐들어가는 사람이 정복하는 세계입니다. 야곱처럼 전투적으로 하나님의 장자직을 지키시고, 강도처럼 하나님의 복을 훔치시고, 공격적으로 기도하셔서 반드시 승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길 빕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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