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080413m: 초심(요 21:3-17)

2008년 4월 13일 주일낮예배
본문: 요 21:3-17
제목: 초심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아시지요? 그 관운장이 다쳤습니다. 그래서 명의 화타에게서 치료를 받는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관운장은 아들 관평을 불러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화타가 수술을 다 마치기까지 눈썹도 까닥않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게 동양에서 말하는 영웅입니다. 을지문덕 장군도 그렇습니다. 모친이 꾼 태몽부터 다릅니다. 용꿈을 꾸었습니다. 금비늘이 번쩍이는 꿈을 꾸었고, 열달이 아니라 스무달만에 을지문덕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영웅이 없습니다. 성경의 특색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신화적 존재가 없다는 겁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나는 열달도 못되어 태어난 덜떨어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또 신약 가운데 한 인물하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주님의 수제자이지만 결코 영웅이 아닙니다. 모순투성이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간 것입니다. 20장에 보면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2번 이상 만나뵌 이후입니다. 20장 19절이하입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게 첫 번째 주님과의 해후이고, 26절이하에 보면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렇게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생생하게 체험했음에도 어째서 그들은 갈릴리로, 옛 직업으로 되돌아간 것일까요? 특히 베드로가 앞장 섰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회의나 불신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과 회의 때문에 낙향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자신의 뼈아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어도 자신의 깊은 상처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큰 소리를 쳤습니까?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고, 옥에도 가고 죽는 자리까지도 함께 하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체포되자 도망치고, 일개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닭소리를 듣고 회개했다 하더라도 그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진 겁니다. ‘나 같은 인간은 사도가 아니라 갈릴리 촌구석에서 물고기 잡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왔지만 그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는데, 바로 그 때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명령에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았습니다. 이 장면은 3년 전에 베드로를 주님이 만나셨을 때와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 때도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을 다시 던지라고 하셨고, 그 때 주님은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첫 소명의 자리에서 주님은 다시 베드로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첫 상황 때와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시며 베드로의 초심을 회복시키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뭍으로 나오자 주님은 이미 숯불을 피우고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낙향한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재 소명을 하시는데 왜 숯불이 등장합니까? 여기서 숯불은 꼭 있어야 할 소품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두 번이나 부인한 현장인 요한복음 18장에도 숯불이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베드로가 불을 쬐었다고 하는데, 요한복음에만은 그 불이 숯불이라고 밝힙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숯불이 등장하는 겁니다. 숯불을 쬐며 실패했기에 숯불에서 다시 베드로를 회복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숯불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리 앉았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저 멀리서 새벽 닭 우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왜 하필이면 그 때 새벽 닭이 웁니까? 베드로가 숯불 곁에서 주님을 부인할 때 그 때도 멀리서 새벽 닭이 울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세 번입니까? 이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의 각본입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뜰 숯불 가에서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상처받은 한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한 주님의 세심한 배려와 고도의 영적인 심리적인 처방입니다. 당시 주님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것을 묻고 따질 수도 있었습니다. 어째서 나를 버리고 도망쳤느냐, 왜 나를 세 번씩이나 저주했느냐, 내가 부활한 사실을 예루살렘에서 확인하고도 왜 낙향했느냐고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랑만 확인하고 계십니다. 왜냐면 첫 사랑이 회복되어야 상처도 소명도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간음, 살인, 도적질만이 죄가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상실한 것도 죄이고, 초심을 잃어버린 것도 죄입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초심을 버린 사람이나 교회는 반드시 주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주님이 확인하고 싶으신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니라 언제나 주님에 대한 사랑과 초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사랑’이란 단어와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이란 단어가 틀립니다. 이 부분은 번역의 한계입니다. 우리말에는 사랑이란 말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헬라말에는 사랑이란 어휘가 많습니다. 아가페, 에로스, 스톨게, 필레오가 있습니다. 종류에 따른 사랑의 어휘가 다릅니다. 그런데 원서를 보면 주님이 물은 ‘사랑’과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이 다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주님이 물은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아가페로 대답한 것이 아니라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필레오는 인간적이고 상대적인 사랑, 곧 우정과 같은 말입니다. 선택적인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필로소피는 철학이란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이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질문에서 주님은 아가페가 아니라 필레오로 묻습니다. 베드로의 대답도 역시 필레오입니다. 왜 주님이 첫 번째 두 번째는 아가페로 물으시고, 세 번째는 필레오로 물으셨습니까? 베드로의 눈높이에 주님이 맞추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필레오 수준의 사랑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아직 필레오의 사랑이지만 그 수준으로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한 걸음 후퇴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그러니까 베드로의 대답에도 한결 힘이 실려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안다’고 했습니다. 비로소 베드로가 안도한 것입니다. 베드로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활하신 주님께 대답해야 합니다. ‘네가 여전히 초심을 잃지 않고 살겠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주님께 꼭 확인의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나를 찾아오신 주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아가페는 안 되어도, 저도 부끄럽지만 필레오 수준에서라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는 고백 말입니다. 그래야 내 모든 상처가 회복되고, 첫 사랑이 회복되고, 첫 소명이 회복됩니다. 그래야만 내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불같은 삶을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부디 첫 사랑을 되찾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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