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24m: 기도란(눅 1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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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4일 주일낮예배
본문: 눅 11:5-13
제목: 기도란?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떼쓰는 게 기도입니까? 우리 교회도 내일부터 4주간 특별 새벽기도회에 들어가는데, 4주 동안 새벽마다 어떻게든 하나님을 설득해서 내가 바라는 바를 얻어내는 게 기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협해서 내 소원을 관철하자는 게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본문 8절 하반절입니다.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기도란 근본적으로 간청입니다. 이어지는 유명한 9절 말씀도 8절의 간청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간청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간청이란 말은 썩 적절한 말이 못 됩니다. 아쉬운 표현입니다. 어휘 자체가 약합니다. 지금 개정판 성경은 간청인데, 전에 개역성경은 강청이라고 했습니다. 원어의 뜻을 그대로 옮기면 수치심이 없는 뻔뻔한 요구입니다. 그러니까 간청보다는 강청이 훨씬 원어적 의미에 가깝습니다. 강력하게 주문하는 행위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절대 염치없는 부탁이나 비굴한 구걸 행위가 아닙니다. 마치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내 돈 내놔하듯이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얼굴이 두꺼워서도, 염치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권리요 자격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미안해서 가급적이면 기도 안 한다고 합니다. 자기는 한 게 없는데 자꾸만 뭘 부탁하는 게 송구스럽다는 겁니다. 이것은 양심도 염치도 아닙니다. 기도가 뭔지 몰라서 그런 겁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 자꾸만 부탁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기도가 필요한데도 자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려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잘난 체 하는 겁니다. 기도는 부탁이나 구걸이나 협박, 설득이 아니라 강력한 청구요 떳떳한 권리 행사입니다. 어째서 기도가 강청일까요?
본문을 보니 어떤 사람이 밤중에 친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내게 손님이 왔으니 떡을 좀 달라고 하자, 친구는 거부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더욱 심하게 친구에게 떡을 요구합니다. 늦은 밤에 먹을 것을 얻으러 온 주제에 이렇게도 뻔뻔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강청입니다. 결국 친구가 항복하지 않습니까? 밤에 친구를 찾아가 먹을 것을 요구한 이 사람은 대체 무슨 근거와 자격으로 잠자는 친구 집의 대문을 무례하게 두드리며 떡을 내놓으라고 한 겁니까? 또 잠자리에 들었던 친구는 무엇 때문에 일어나 떡을 내어 준 겁니까?
이 두 사람의 관계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은 죽마고우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늦은 밤에 찾아가 생난리를 쳐도 전혀 무례하지 않은 겁니다. 친구 집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집을 찾아가서 무례하게 굴었다면 그 사람이 무사하겠습니까? 그러나 둘도 없는 친구지간이었기에 그 무례하고 일방적이고 뻔뻔한 강청이 통한 겁니다. 여러분, 기도는 부탁이나 구걸이 아니라, 강청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친구지간 정도가 아니라 부자지간이기 때문입니다. 11절 이하입니다.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부모에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구걸하는 자식 보셨습니까? 자식에게 적선하거나 자선하는 부모 보셨습니까? 자기가 맡겨 놓은 게 아닌데, 자식이 내 놓으라고 하면 자다가 일어나서 다 내줘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원수 아닙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으며, 자식이 뭘 요구해도 부모는 다 내 줘야 합니다. 이게 부모자식 사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친구지간이 아니라 부모자식간입니다. 그래서 한밤중이라도 행패에 가까운 강청을 하는 겁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뻔뻔한 특권이요, 응답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신성하고 고유한 책무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기본적으로 관계요 신분이지, 결코 방법이나 기술이나 요령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는 훌륭한 언어나 시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꾸만 요령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는 시를 쓰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자격이요 권리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하고 기도하면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공세로 나가야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하나님을 이긴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주십니다. 우리가 싸우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주시고 싶어도 안 되는 겁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이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공격적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져주십니다. 다만 이렇게 강청하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하나님께는 안타까움입니다. 야곱뿐 아니라 누구든 하나님께 씨름을 걸면 하나님은 져주십니다. 우리는 너무 정중합니다. 간청하지 마시고, 강청하십시오.
친구 집을 찾아가서 강청하지 않고 사정하거나 설득했다면 과연 그가 떡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관계를 들이대며 강청했기에 떡을 얻은 게 아닙니까? 하나님도 자녀가 강청하고 나서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3).
그런데 13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가 강청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합니다. 왜 내가 구하지 않은 것인 성령을 주신다고 합니까? 동문서답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게 맞습니다.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은 우리가 주문하고 강청하는 것의 근본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이것저것 사달라는 아이에게 그것을 다 할 수 있는 금액을 주신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혜사, 해결사라고 합니다. 파라클레토스 라는 말은 돕는 자, 해결사라는 뜻입니다. 성령만 충만케 하시면 만사형통입니다.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주시고, 이 문제 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해답은 오직 하나 성령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의 모든 강청이 그 시간부터 해결되고 수습됩니다.
여러분, 기도에 계절이 따로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가을이 좋습니다. 우리 아이들 수능도 있고, 연말결산도 준비해야 하며, 사색하기에도 가장 좋은 절기입니다. 이 가을에 강청이라 이름하는 기도 생활에 정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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