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03n: 일꾼(골 1:21-25) 여전도회 헌신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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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3일 주일오후예배/여전도회 헌신예배
본문: 골 1:21-25
제목: 일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우리가 함께 본 골로새서 1장 21-25절 말씀은 바울이 제시한 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이 누구인지를 적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골로새교회에 필요한 일꾼, 우리 푸른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도 바로 이런 조건의 사역자들입니다. 22절입니다.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 이런 사역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선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입니다. 23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그런데 25절을 보면 “교회의 일꾼”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교회의 일꾼 이전에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바람직합니다. 복음의 일꾼이 23절에 나오고, 교회의 일꾼이 25절에 나오는데, 이 수순이 옳습니다. 우리 여전도회는 푸른교회의 일꾼입니다만, 정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일꾼인 것은 사실이나 교회의 일꾼이란 것은 교회의 조직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복음의 일꾼이 되라는 뜻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복음에 대한 확신,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고 계십니까? 23절을 보면,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에게 간증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의 일꾼은 필연적으로 복음의 일꾼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자기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웃에게 복음을 말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어 올 수 있겠습니까? 여전도회는 교회의 전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일꾼 이전에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하고, 그 이전에 복음에 대한 신념과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의 일꾼 노릇을 제대로 못 합니까? 결국 개인적으로 복음에 대한 신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얼마나 가슴이 뜨겁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웃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여전도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타성에 젖어서, 경직된 조직의 일원으로서 아무런 생산적인 사역도 못하고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헌신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주관적인 복음에 대한 신념이 약하면 안 됩니다. 골로새교회 일꾼들을 얘기하면서 바울은 교회의 일꾼 이전에 복음의 일꾼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직책을 맡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것과 같은 겁니다. 명실상부한 여전도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신념이 확고부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백과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25절입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해서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되었노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의지가 있습니까? 내가 푸른교회 여전도회 회원으로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겠다는 결심이 있으십니까? 그런 게 있을 때 교회의 참된 일꾼이 됩니다. 바울도 그런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사역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부분이 약합니다. 항상 내 뜻이 우선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은 차선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먼저 구하라고 했는데, 우리는 항상 내 뜻이 우선순위 제1번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의 뜻이 제1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뒤로 밀립니다. 내 일이 없어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을 못했다고 합니까? 이 점을 반성하고 회개하지 않는 한 우리가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참된 일꾼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은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문제가 많은 것도 무자격자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오늘 현실 교회입니다. 내게 주신 직분에 따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 바로 과거 골로새교회가 원했던 일꾼이고 오늘 우리 푸른교회가 필요로 하는 일꾼입니다. 주님이 죽음 앞에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가 교회 일꾼들의 영원한 사표입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영원한 모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관철한 주님의 태도 말입니다. 아버지는 십자가를 원하셨기에 개인적으로는 그게 싫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십자가의 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라면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하는 고백이 교회 일꾼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모습과 얼마나 거리가 있습니까?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가 일꾼입니다. 24절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운다는 이 말씀보다 더욱 절묘한 말씀은 없습니다. 바울은 고난의 의미를 꿰뚫어 본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해석해야 교회의 일꾼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당하는 고난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행위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사역하며 당하는 고난의 정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 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입니까. 이런 자세로 일할 때 교회를 위한 내 사역이 넘치는 은혜가 됩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항상 감사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내가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러니 형장에서 처형당하면서 까지도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게 고통이며 아픔이며 손해며, 견딜 수 없는 내 자존심의 훼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고난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인데, 이것을 마다하고 달아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것은 고난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이 그냥 불행이며 손해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난이 닥치면 필연적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차원을 달리해서 고난은 주님의 십자가에 내가 온몸으로 참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 고난 중에서도 보람과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몸 된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의 자격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주님을 위한 사역은 그 자체가 고난이요 손해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극복하며 도리어 감사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사역에 임할 수 있는가는 바울처럼 고난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도리어 감사하며 주의 성호를 찬양할 줄 알아야 정말 과거 골로새교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푸른교회에서도 복음을 위해 충성봉사하는 신실한 일꾼이 됩니다.
찬송가 작사가 가운데 프랜시스 해버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영국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유학했습니다. 독일 뮌헨 미술관에 가서 렘브란트 그림을 보다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그림을 보고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아래에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우리 새찬송가 311장입니다. ‘나는 널 위해 내 몸을 주었으나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는 글귀입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이 찬송가를 작사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남은 고난을 여러분의 육체에 채우십시오. 십자가를 노래하는 사람은 많으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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