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다윗의 마스길(시편 53편)

2010. 8. 26.

다윗의 마스길

시 53:1-6

 

시편 14편과 53편은 내용이 동일합니다. 단지 표제어가 다를뿐인데 14편은 <다윗의 노래>라고 한 데 반해 이 53편은 <다윗의 마스길>, 즉 <다윗의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은 기본적으로 노래이자 찬양이며 내용은 모두가 교훈적입니다. 종교적인 교훈을 노래로 만들어 백성들을 교육하고 또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마할랏에 맞춘 노래>란 이미 존재하던 어떤 노래의 운율에 맞추어 부르라는 지시 같습니다. 교훈은 자칫 딱딱하고 건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이라도 노래로 만들어 부르면 즐겁게 묵상할 수 있고, 또 오래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반복 교육

한 권의 책 안에 동일한 내용을 두 번이나 반복한 이유가 뭘까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되어야 합니다. 늘 새로운 말씀만 찾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새로운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미 다 계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앙교육은 부단한 반복 교육일 뿐입니다. 그들은 <쉐마>라 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는 말씀을 손목과 이마,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고 항상 묵상하고 순종하려고 애썼습니다. 설교나 성경공부의 과제도 새로운 것을 선포하고 찾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실천하고 결단하도록 돕느냐에 있습니다. 설교는 결코 귀를 즐겁게 하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고 반복 교육을 통한 실천과 결단의 촉구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어리석은 자>(1절), <지각이 없는 자>(2절), <더러운 자>(3절), <무지한 자>(4절)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교육을 받지 못한 자>나 <교양이 없는 자>가 아니라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라고 합니다(1절).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 자>라고 합니다(4절).

맞습니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가르는 잣대는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오직 과학과 이성만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을 보십시오. 고릴라가 인간의 조상이라고 우기며 가장 비인간적인 진화론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한편 약자의 희생과 강자의 억압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밀림의 법칙으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성의 시대라는 20세기에 두 차례나 야만적인 세계 대전을 치른 것이 작금의 인류입니다.

몰라서 그랬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서슴없이 그런 가공할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지능적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성은 마치 말과 같아서 누가 타느냐에 따라 사탄의 노예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는 소년이라도 노인보다 지혜롭고, 많이 배우지 못했을지라도 박사보다 더 현명할 수 있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

오늘의 시편 말씀이 가장 문제시하는 부류는 머리나 입, 또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삶으로는 아닌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시인은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악한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므로 가증한 악을 저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나 다를 게 없다는 선언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 인생들을 굽어 살피고 계십니다(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