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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8년 3월 26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후서 강해 3<br>본문: 고후 2:1-17</p>
<!-- paragraph:p0002 -->
<p>[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p>
<!-- paragraph:p0003 -->
<p>2장의 주제는 징계와 사랑입니다. 바울이 무한한 연민과 애정으로 고린도 교회의 질서를 잡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바울의 무한한 애정이 나타납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절을 보면 근심하게 한 자 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린도 교회의 극심한 혼란을 겪게 하고 바울을 근심하게 한 요주의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 큰 교회는 아닌데 지상의 교회가 겪을 수 있는 온갖 문제를 다 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 문제의 백화점 같은 곳이었습니다. 6절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고린도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사람들을 근심하게 한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징계가 없다는 겁니다. 원래는 교회에 권징이 엄격했습니다. 죄를 범하거나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치리위원회가 설치되어 권징했습니다. 장로교 헌법에 보면 권징 부분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치리가 하나도 이루어 지지 않고 있습니다. 전에는 교회를 옮길 때도 “이명”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전출과 전입신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서 사고를 치고 저 교회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법이 있지만 그 법이 유명무실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리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들은 벌 받아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래야 교회의 기강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징계가 없어졌기 때문에, 헌법은 있으되 치리가 없어졌기에 한국교회가 무질서 해졌습니다. 교회는 구속력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옛날에 교회는 징계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징계를 묵묵히 받았습니다. 정직을 당하기도 하고, 한 달 두 달 교회출입도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p>
<!-- paragraph:p0004 -->
<p>바울은 6절에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벌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하는데 응분의 벌을 받았다면 그 때는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의 징계는 교회를 세우고 신자들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벌을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벌을 받았으면 위로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리당한 자들에 대한 관용과 용서를 당부합니다. 흔히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11절을 보면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합니다. 죄는 벌하고 죄인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대하는 이유는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사단의 궤계는 징계를 통해 사람을 죽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다른 점입니다. 주님은 징계를 통해 사람을 살리기를 원합니다. 사단의 궤계는 죄지은 사람을 심하게 공격해서 결국은 자폭하게 합니다. 주님은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하심으로써 죄인이 새 사람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징계 후에는 사랑을 베풀라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도해서 세운 교회인데 그들이 바울에게 대적한 것입니다. 그런 일에 대해 바울은 징계해야 한다고 합니다만, 그들이 너무 많은 근심에 빠지지 않도록 격려하라고 합니다. 사단이 원하는 바는 너무 많은 근심으로 인해 신자가 자폭해 버리는 것인데 이를 조심하라는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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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히브리서 12장 6절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시느니라.” 주님의 징계는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에는 징계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자식이 잘못했으면 매질을 해야 사랑하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질을 당할 때 주님의 사랑을 확인해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버리셨나보다 하면서 좌절부터 합니다. 주님의 징계는 나를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죄를 짓거나 잘못을 범한 사람이 있으면 따끔하게 징계하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교회 내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징계만 해서 실망과 좌절 가운데 버려두면 마귀의 궤계에 빠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채찍과 당근으로 연단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채찍과 당근”, 이 두 가지를 우리도 활용해야 합니다. 당근만으로 채찍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어야 가정에서 자녀양육에 성공합니다. 또한 교회에서도 교회의 질서를 아름답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징계가 꼭 필요하지만 반드시 징계 다음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불행의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p>
<!-- paragraph:p0006 -->
<p>14-16절 말씀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향기입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공의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실제 세상을 살면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순간순간 공의와 사랑으로 사는 사람에게서는 생명의 냄새가 납니다. 반면에 16절에 나오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는 징계 후에 상처를 싸매주는 것이 없이 그 사람을 망하게 할 때 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생명의 냄새가 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죄는 징계하되 그 사람은 사랑하고 용서하여 죽이지 않고 살리는 것이 목표가 되고 보람이 될 때, 그렇게 행하는 사람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내 삶에서 그리스도의 징계와 사랑이 구현될 때 가장 품위있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을 통해 바울이 강조한 징계와 관용, 징계와 사랑, 채찍과 당근을 기억하십시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실천되고 구현되어 여러분의 인품과 삶에서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기원합니다.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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