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바그너 200주기

<리차드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5.22.-1883.2.13.)는 우리에게 그리 친숙하지가 않습니다. 음반은 나와 있어도 실제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는 거의 없기 때문인데 그것은 국내 음악팬들이 바그너 음악의 진중하고도 묵직한 사색보다는 이탈리아 출신의 베르디 같은 화려하고도 유려한 서정성을 더 선호해 온 탓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바그너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편성이나 무대 규모가 워낙 방대한데다 힘이 넘치는 노래를 장시간 부를 수 있는 오페라 가수가 국내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바그너의 곡 중에는 <파르지달>처럼 바그너 전용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독일 바이로이트에서만 독점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우선 바그너의 곡들은 길이가 4시간에서 16시간에 이를 만큼 깁니다. 그의 대표작인 <니벨룽겐의 반지>는 전곡을 연주하는데 무려 나흘이나 걸립니다.  또 바그너의 오페라와 악극은 모두 중세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 복잡할 뿐 아니라 대부분 관념적이거나 신화적이어서 몹시 지루하고 어려우며 전후 문맥에 대한 사전 이해 없이는 뭐가 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을 만큼 난해합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조차 <바그너의 작품 중에는 좋은 부분은 몇 순간이고 나쁜 부분은 몇 시간이다>고 평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부부치고 바그너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로얄티도 지불하지 않고 그의 곡으로 웨딩마치를 울리며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딴딴 따단~ 딴딴 따단~> 하는 국민 웨딩마치가 바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에 나오는 <혼례의 합창> 곡입니다. 제가 알기로 독일 출신 음악가들 중 남부 독일 바이에른 주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에 있는 바그너의 생가 <반프리드> 하우스만큼 유명한 곳은 없습니다. 바그너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하여 살았던 그 집은 바그너 오페라의 대주제를 표현한 <스크래피토우> 벽화에 바그너 음악 미학의 핵심을 새긴 정문 위의 명각이며 입구에 세워진 그의 광팬이자 확실한 후원자였던 <바바리아 왕국>의 <루드비히 2세>의 흉상, 또 바그너 자신이 후정에 만들어 놓은 부부와 애견 <루스>를 합장한 무덤 등 모든 게 다 그의 존재만큼이나 독특하고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래서 올해가 200주기가 되는 해며 특히 그가 태어난 이 5월에는 독일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풍성한 기념 연주회와 공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의 가정사는 순탄치 못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에게 예술적 감성을 갖게 한 의붓아버지마저 그가 여덟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9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18세 때는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불행한 가정 탓인지 그의 성격은 대단히 괴팍했고 독선적이었습니다. 첫 결혼에서 실패한 그는 제자이자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요 지휘자였던 뷜로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결국 재혼까지 하는데 그녀는 당시 유명한 음악가로 낭만파의 거장이었던 프란츠 리스트의 둘째 딸 <코지마>로 바그너보다는 무려 24세나 연하였습니다.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음악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합니다. 그는 <종합예술 이론>을 주창하며 작곡뿐 아니라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체인 독특한 악극(Music drama)을 창시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7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바그너 공연은 여러 가지로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 1부 첫 화음은 <로엔그린> 1막 전주곡이었는데 그 곡은 조용하고 차분한 곡 같지만 현악기만 한 16성부 쯤 되는 몹시 복잡한 곡입니다. 그런데도 그날 연주는 가벼운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성부 하나하나가 마치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물결처럼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클라이맥스를 지나서도 곧바로 김이 빠지지 않고, 어떻게 들으면 처연한 화음을 집요하게도 살려내는 연주자들의 집중력이 돋보였습니다. 제2부의 <니벨룽겐의 반지> 관현악 하이라이트 연주는 네덜란드 작곡가 헨크 데 블리거가 장장 16시간짜리 원본을 67분으로 압축해 놓은 편곡집을 바탕으로 연주한 것인데 사실 이번 연주회의 최고 수확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악 파트는 한없이 가늘면서도 맑고 높은 선율을 연주하다 급반전하여 복잡하고도 절묘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관악기는 바그너 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두툼한 음색으로 특유의 웅장함을 잘 대변했습니다. 그러나 스케일이나 완성도에 있어서 아직도 너무 초라하고 역부족이라는 아쉬움은 떨칠 수 없었는데 그래도 저로서는 실연에서 바그너를 그만큼이라도 전달했다는 점에서 다 용서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