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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1m: 높은 산에 오르라!(눅 9:28-36)

2010년 7월 11일 주일낮예배/교회학교교사주일
본문: 눅 9:28-36
제목: 높은 산에 오르라!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어제와 그제 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용인 자연휴양림에 갔었는데, 뒷산에 올라 기도해보니 주님과 둘만 있는 것 같아 참 좋았습니다. 청년부와 함께 찬양하다보니 이래서 주님이 가끔씩 산을 찾으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주님 말씀 가운데서 주옥같은 말씀을 보훈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 6, 7장인데, 이것을 산에서 말씀하셨기에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주님이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얘깁니다. 마태복음 17장에도 이 얘기가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그저 산이라고 표현합니다만, 마태복음에는 높은 산이라고 표현합니다. 팔레스틴에는 그다지 높은 산이 많지 않습니다. 이 산에 오르신 시점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신앙고백이 있은 후입니다. 28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저런 답변을 합니다.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주님이 이 대답에 대해 말씀을 하셨는데, 이게 바로 28절의 이 말씀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거기서 북쪽으로 가면 해발 2,814미터 높이의 헬몬산이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그 산에 오르셨던 것 같습니다. 왜 주님이 헬몬산에 오르셨을까요? 제자들에게 기도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28-29절을 보니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고, 기도할 때 용모가 변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그냥 이름난 헬몬산을 등반하기 위해 가신 게 아니라 제자들에게 기도훈련을 위해서 가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자주 산에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근교의 감람산에는 습관적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다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한번은 바다 위를 걸어 풍랑만난 제자들에게 주님이 오셔서 구출해주신 적이 있는데, 그때도 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의 비명을 듣고 오신 겁니다. 

우리도 산 아래서만 있지 말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십시다. 등산도 좋습니다만, 산에 가시면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잘 됩니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에 못 올라가면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고독한 단독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서라고 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누구를 의식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집중 안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사람 들으라고 기도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인데, 오직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만 집중하려면 산이나 골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정직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의식하게 되면 기도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면 자꾸만 시를 쓰게 되는 겁니다. 적나라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여튼 기도는 때 묻은 일상에서 구별된 성소에서 바치는 겁니다. 그래야 정말 기도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금식하며 기도하고, 새벽에 나와 기도합니까? 일상에서 구분된 시간과 장소를 찾다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은 높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일상에서 벗어난 성역이 필요한 겁니다. 골방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 찾다 보니 산에 오르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산뿐만 아니라 광야나 들에도 홀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여간 일상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으신 겁니다. 그래야 세상살이에서 거칠어진 우리의 심성이, 우리의 영혼이 정화됩니다. 얼마나 우리의 심령이 거칠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감람산에서 기도는 하지 않고 졸거나 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잠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험에 패하지 않습니다. 부디 무더운 여름에강이나 바다에 놀러갈 생각하지 마시고 수련회나 기도원을 찾아가셔서 기도를 많이 하고 오십시오. 그게 가장 실속있는 휴가요 방학입니다. 여름이면 좋은 데로 여행갈 계획은 세워도 기도하러 갈 계획은 세우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기도하러 가야합니다.

다음은 제자들의 신비체험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29절 이하입니다.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제자들은 그 산상에서 놀라운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주님의 용모가 변한 겁니다. 주님의 얼굴과 옷에서 빛이 났습니다. 저 산 아래서는 미처 그런 모습을 뵙지 못했는데, 그 산상에서 그런 신비체험을 한 겁니다. 또한 구약에서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를 만난 겁니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현장입니까. 이것을 경험케 하기 위해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겁니다. 그것도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체험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너무 황홀해서 33절을 보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고 말합니다. 여기에 마냥 살자고 합니다. 이 신비체험 속에 마냥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신앙세계에는 분명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또 가끔은 이런 현상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그것을 인정하셨기에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이런 신비를 체험케 하신 겁니다. 아마도 이 체험 후로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의 신앙이 한결 깊어졌을 겁니다. 모세도 시내산에 올라 40일동안 하나님의 면전에서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고 내려오니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고 했습니다. 신비체험은 우리 신앙의 깊이를 더합니다. 방언 못하던 사람이 방언만 해도 달라집니다. 환상 못 보던 사람이 환상만 봐도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초막 짓고 살자고 하니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게 안 됩니다. 우리는 산상에서 신비체험하면 자꾸만 거기 살려고 합니다. 산 아래로 안 내려 오려고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그런 제안을 묵살하십니다. 1박 2일만 거기에 계셨습니다. 우리는 신비체험을 하면 그걸 선전하고 다니고, 돈 받고 팔아먹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당장에 거기에 초막도 짓고, 기도원도 짓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거기에 불러 들입니다. 마태복음 17장 9절에 보면 주님은 오늘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 용모가 변화된 것,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것을 발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팔아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초막 셋 그러니까 기도원 짓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니면서 떠들어 대는 것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신비체험이 있습니다만, 기독교는 열광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때로 산이나 들로 나가 고독하게 기도하기는 하지만, 은둔주의는 아닙니다. 

좀 유치한 얘깁니다만,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신부와 목사가 누가 더 영성이 깊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거의 신부님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부가 더욱 금욕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신부들은 초막 셋을 짓고 거기에 살고 있는 겁니다. 현실 복귀를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세상 한복판에서 삽니다. 가족과 함께 뒹굴며 삽니다. 그러면서 목회하는 게 영성이 깊은 겁니다. 주님은 결코 은둔주의를 용납하시지 않았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주님이 산에서 내려오자 어떤 아비가 귀신들린 자기 아들 고쳐달라고 남은 제자들에게 데려와서 제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런 겁니다. 산 위에는 멋지지만, 산 아래는 악한 권세에 휘둘리는 아비규환입니다. 그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라는 게 바로 주님의 뜻이요, 이게 기독교입니다. 주님은 고행도 금욕도 은둔주의도 기도원에서만 사는 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1박 2일만 허용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제자들의 말씀훈련을 위해서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35절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마태복음 17장 5절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이런 하나님의 생생한 육성을 들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제자들은 산 아래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자 듣게 된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이런 음성을 듣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소란합니다. 세상에는 소음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일상과는 구별된 높은 산, 지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이 세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육성을 듣기 위해섭니다. 우리가 기도원에 가는 것은 기도도 하고 말씀을 들으러 갑니다. 정말 산 아래서는 미처 듣지도 받지 못했던 은혜를 체험하고 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육성을 변화산상에서 들은 겁니다. 그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잊지 못할 하나님의 음성이요 말씀아니었겠습니까. 평생 가슴에 담아두고 살지 않았겠습니까. 부디 올 여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55장 3절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신명기 28장 2절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꼭 올 여름에 높은 산에 오르셔서 일상과는 확실하게 구별된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런 세미한 음성, 하나님의 뜨거운 육성을 체험하는 복된 성도들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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