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19w: 사순절 강해 2(요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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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9일 수요성경공부 고난주간 본문 강해 2
본문: 요 19:25-27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자기 모친 마리아를 사랑하던 제자에게 부탁하는 대목입니다. 가상칠언에서 세 번째 말씀입니다. 사랑하시던 제자는 요한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이요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 요한이 쓴 책입니다. 자기 이름을 한 번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 대신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같이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어부란 유대 사회에서 최하위 층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3절에서 보듯이 요한은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요한이 요한복음서를 쓸 수 있었을까는 의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이긴 하지만 매우 사색적이고 철학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전기적인 성격 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를 해석해 놓은 보다 신학적인 책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는 요한복음 첫 구절의 말씀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부분은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면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을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요한의 호칭 중에는 ‘사랑의 사도’도 있습니다. 그 어떤 제자보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란 말이 마태복음에는 14번, 마가복음에는 7번, 누가복음에는 16번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57번 나옵니다. 요한일서에는 길지도 않은 글인데 사랑이란 말이 46번 나옵니다. 요한은 성서 저자 중에서 하나님을 규정하는 말로 “하나님은 사랑이다”고 표현한 유일한 저자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과 16절에서 이렇게 두 번이나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에베소 교회를 목회했습니다. 말년에는 오로지 사랑만 설교했다고 합니다. 밧모 섬에 유배되기 전에도 에베소 교회를 목회했고, 밧모 섬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에베소 교회에서 사랑만 설교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했는데, 제자들이 부축해서 강대상에 앉혀놓으면 ‘소자들아 사랑하라’는 설교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 한 마디에 온 교회가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본래부터 이토록 심성이 고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커녕 과격하고 다혈질이었습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별명을 붙이시기를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은 주님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실 때 그들이 방해하자, 야고보와 요한이 흥분해서 당장에 하늘에서 불을 내려 쓸어버리자고 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했을까요?
먼저 주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체험에서 나온 그의 정직한 고백이요 간증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3절을 보면,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젖먹이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긴듯한 묘사입니다. 이처럼 그는 각별한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고 19절에서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합니다. 먼저 사랑받았기에 요한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많이 사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랄 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커서도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받은 게, 배운 게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처음에는 아주 거칠고 공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만, 주님을 만나 사랑을 듬뿍 받고나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자기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고백하고 싶었으면 자기 책에 자신을 가리켜 ‘주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했겠습니까? 찬송가 85장에는 ‘예수의 넓은 사랑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안다’고 했습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을 듬뿍 체험하십시오. 그래서 모두 요한처럼 사랑의 사도요 화신이요 전도사가 되십시오.
다음으로 요한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빚진 자 의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을 보면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고 합니다. 요한도 달아났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 밑에는 요한만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을 우리는 빚지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안식일 다음날에 주님의 무덤에서 주님을 만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던 것도 마리아가 주님께 대한 사랑의 빚을 많이 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채무자 의식을 상실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엄연히 큰 빚을 지고도 채무의식 없이 살아가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 요한처럼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랑의 빚을 조금씩 이나마 갚으며 살아야겠습니다.
요한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자기도 사랑했기에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주님이 모친을 부탁하자 요한은 곧바로 자기 어머니로 모셨다는 겁니다. 이후에 요한은 팔레스틴을 떠나 소아시아 선교에 나서는데 에베소까지 마리아를 모시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에베소에서 살다가 에베소에 묻혔습니다. 지금 터키에 가면 마리아와 관련된 유적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이 행한 이유는 바로 주님이 사랑했던 모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겠다는 말이 맞습니다. 주님은 사랑하셨지만 나는 못 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내 본능과 의지로는 되지 않지만 주님이 포용하셨기에 나도 포용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님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은 자세입니다. 이것이 실천적인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은 반드시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에 대한 나의 사랑에서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보라 내 어머니다, 내 아버지다, 내 형제다, 내 이웃이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모든 이웃들을 사랑하셔서 요한과 같은 사랑의 사도로 새로워 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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