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칼과 예수

  <파라독스>란 언뜻 보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탁월한 진실이 담긴 역설을 뜻합니다. 그런데 파라독스 어법을 가장 자유롭게 구사하신 분은 역시 주님이십니다. 성경이야말로 역설의 집대성이며, 오늘의 현실을 합리화해 주기보다 신랄하게 부정하고 도전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논법은 항상 현실의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성경의 이 역설 앞에서 자신이 딛고 선 땅이 일순간 꺼지는 듯한 경험을 해야 옳고, 또 그럼으로써만 진정한 생명의 대지 위에 흔들림 없이 설 수 있음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큰 것이 작은 것에, 폭력이 무저항 비폭력에 굴복하는 현실 세계의 역전과 반전이 바로 성경의 파라독스가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새 질서>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아니, 산상보훈에서는 <평화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하시고,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베드로를 향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신 분이 여기서는 <내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니 이건 대체 무슨 역설이십니까? 특별히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시며 하신 말씀인 만큼 가슴에 비수 하나씩을 품고 가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테러리스트도 아닌 분이 어째서 이렇게 <자객이 되라>는 식의 과격하고도 섬뜩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칼과 예수>, 하기야 언젠가는 이런 말씀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눅 22:36). 

  그렇습니다. 칼 앞에 서면 우리는 누구나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주님도 언제나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음성은 부드러울지라도 그것은 늘 칼끝에 자기의 목을 내대는 비상한 결단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항상 <날 선 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양심을 찌르는 칼이며, 사랑이 식은 자 앞에서는 차가운 심장을 도려내는 칼이고, 악한 마음을 품은 자 앞에서는 선한 자를 지키는 수호의 칼입니다. 또한 참된 지혜에 귀 어두운 세상을 향해서는 이 시대의 골수를 찔러 쪼개는 보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의 평화만 볼뿐 칼의 존재는 항용 잊고 살기에 주님이 지금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 보내시며 칼을 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칼 없는 복음은 굳어버린 양심과 냉혹한 시대정신을 찔러 쪼개는 집도에 나서지 못하며, 칼에 찔림이 없는 존재는 결코 옛 껍질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칼에 찔림으로 아파해야 하고 또 그곳에서 새 살이 돋아나야 합니다. 생명의 온기가 흐르고 거짓 없는 사랑의 맥박이 다시 고동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과 삶에서, 우리의 믿음에서 주님의 칼이 번뜩임을 세상 모든 이들이 다 느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살기>가 아니라 <생기>이므로 너와 내가 사는 참된 길일 것이고, 6.25 60돌을 맞는 이 녹슨 분단시대에 우리 민족의 운명을 구하는 진정한 메스가 될 것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칼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