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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00620m: 어느 장애인의 구원(막 10:46-52) 장애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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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20일 주일낮예배/장애인주일</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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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본문: 막 10:46-52</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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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제목: 어느 장애인의 구원</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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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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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오늘은 교단 총회에서 제정한 장애인 주일입니다. 누가 장애인입니까? 주님이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야 말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도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다른 이가 아닌 우리가 장애인이란 말입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하나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멀쩡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장애인 정도가 아니라 중증입니다. 위기입니다. ‘나는 아니다’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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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등장하는 여리고의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의 구원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자신의 육체적 장애를 이겼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영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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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는 믿음으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47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면서 지나갑니다.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던 바디매오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을 비하하는 칭호입니다.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게 나오겠느냐며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칭호 가운데 나사렛 예수 라는 말은 예수님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라고 하는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나사렛 예수의 반대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에 대한 최고의 칭호입니다. 과연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눈뜬 멀쩡한 사람들은 다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데, 소경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비록 시각 장애인이었으나 주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바르게 믿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5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주님도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데, 시각 장애인이며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합니다. 주님이 그의 믿음을 인정하신 겁니다. 여러분, 믿음의 기도, 부르짖음이 장애를 이기게 합니다. 당시 여리고에 시각 장애인이 바디매오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바디매오 한 명입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에만 주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왜냐면 그의 부르짖음에는 자신을 구원할만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구경하는 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을 나사렛 예수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불렀던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바디매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르셔야 주님이 가시던 길을 멈추고,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며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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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디매오가 믿음을 갖고 부르짖었다고 해서 당장에 구원을 받은 게 아닙니다. 그는 나름대로 과정 곧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르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서서 바디매오를 잠잠하라고 자제시킨 겁니다. 주님을 향한 부르짖음을 방해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앞서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앞서가는 자들은 주님의 측근 곧 제자를 가리킵니다. 주님께 나오는 사람을 안내하고 격려해야 할 사람들이 제자들인데, 그들이 바디매오를 꾸짖은 겁니다. 앞 못 보는 장애인을 주님의 측근들이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좌절합니다. 주님을 부르고, 주님께 나왔다가도 주님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 떠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다치고, 장로, 권사, 집사에게 상처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제자들이 꾸짖고 방해하자 당장에 포기하고 돌아섰습니까? 아닙니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와 바디매오가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시험받고 상처받아 떠나지만, 바디매오는 이렇게 합니다. 48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비명을 지르듯이 자신의 구원을 호소한 겁니다. 위축되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기죽지 않고 더욱 소리쳤습니다. 바디매오가 주님 측근들의 방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만일 그가 거기서 실패하고 좌절해 포기했다면, 제자들을 붙잡고 따지며 싸웠더라면, 그도 별 수 없이 평생 소경을 살아가야 했을 겁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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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이때 주님은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여리고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여리고를 나가시면 언제 다시 여리고에 오실 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시험에 들어 포기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협조는 커녕 가시노릇을 한다해도 거기에 좌절하지 마시고 더욱 큰소리로 부르짖으십시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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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드디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49절입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그러자 바디매오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맹인인지도 잊고 뛰었습니다. 너무도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50). 겉옷마저도 내던졌습니다. 겉옷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재산목록 1호입니다.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겉옷이 이불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법에 저당을 잡혀도 겉옷은 해질녘이면 돌려주었다가, 다시 아침에 저당을 잡혀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디매오는 자신에게 중요한 겉옷일지라도 주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기에 내던졌습니다.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해도 그것이 내 진로를 방해하면 가차없이 포기할 줄 알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게 안 되기 때문에 참으로 주님 앞으로 뛰어나가기가 어렵고 잘 안 됩니다. 너무 가진 게 많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바디매오는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거지가 자기 겉옷까지 포기하고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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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십니다. 우리 소원도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꼭 당신 앞에 나온 사람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제목을 하나하나 다 체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을 정확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막연하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이게 제 소원이고, 이만큼 필요하고, 언제 필요하고,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를 일일이 구하십시오. 주님이 반드시 점검해 보십니다. 바디매오는 이렇게 구합니다. “보기를 원합니다.” 너무도 자명한 대답입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듣고 싶으셨는데, 바디매오가 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바디매오는 당연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하겠으나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바디매오가 다른 것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주님 보실 때 엉뚱한 게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확하게 자신의 구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제대로 구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향해 ‘무엇을 원하느냐?’고 할 때 무엇을 대답하시겠습니까? 생각만큼 정확한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엉뚱한 것만 구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해가 되고, 날카로운 칼 같은 것만 구하고, 결국에는 저주가 되는 것을 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보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당장에 들어주십니다. 야고보서 4장 2절 이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구해도 주지 않습니다. 금식하며 철야해도 안 들어 주십니다. 안 들어주시는 게 기도응답입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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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자신의 정신적, 정서적, 영적, 육체적 장애를 정직하게 시인하고 주께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음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워지십시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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