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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2008년 3월 16일 종려주일 낮예배<br>본문: 요 19:28-30<br>제목: 다 이루었다!</p>
<!-- paragraph:p0002 -->
<p>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p>
<!-- paragraph:p0003 -->
<p>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거기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우리 기독교의 상징이지, 원래는 로마사람들의 끔찍한 형틀이었습니다. 저는 일찍이 이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시는 수단으로 십자가를 택하셨을까?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라는 끔찍한 방법 말고도 좀 더 품위있고 아름다운 방법이 있을 수 있을 터인데, 어떻게 그토록 처절한 십자가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일까요? </p>
<!-- paragraph:p0004 -->
<p>십자가를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주님을 3년간 모시고 다녔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주님이 사실 몇 차례 예고를 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십자가를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받은 제자들의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 때 무리들이 너도나도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외세인 로마를 팔레스틴에서 몰아내고 왕으로 돌아가실 줄 알았지 그토록 허무하게 십자가에 달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왕만 되면 자기들이 다 요직에 앉아서 권력을 행사할 줄 알았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경악하며 다 달아난 것입니다. </p>
<!-- paragraph:p0005 -->
<p>제자들만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 보면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하는데, 십자가가 너무도 기상천외한 것이어서 천사들도 어리둥절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3장 20절 이하에 보면 십자가를 노아의 홍수에 비유한 대목이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심판용이었습니까 구원용이었습니까? 일차적으로는 심판용입니다. 죄인들을 응징하시기 위해 홍수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방주에 탄 사람들에게는 홍수가 구원의 방편입니다. 멸망당할 사람에겐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방주 안의 노아의 식구들에게는 구원의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를 통해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노아의 홍수와 같다는 겁니다. 어째서 그럴까요?</p>
<!-- paragraph:p0006 -->
<p>주님은 오늘날로 따지면 금주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오후 6시에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 떠나십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겁니까? 이것을 밝혀야 십자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의도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밝혀집니다. 무엇을 이루시기 위해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이 굳이 엽기적인 십자가를 택하셨을까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고유한 속성의 첫 번째가 공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기에 거룩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에 절대 죄를 묵과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악을 간과하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죄나 악은 응징하셔야 합니다. 반대로 선은 상을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움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하나님 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모든 인생이 죄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왜 죄인입니까?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이것이 소위 원죄입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죄인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원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우리 스스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범죄입니다. 자범죄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원죄 때문에 이미 죄인입니다. 아담의 죄를 왜 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합당치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한국이라는 국적을 택하지 못하고 선택의 여지없이 한국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예라는 이유 때문에 원죄를 쓰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으로는 성악설이 맞습니다. 모두가 아담의 후예로서 원죄를 쓰고 태어났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p>
<!-- paragraph:p0007 -->
<p>그런데 하나님의 제 2의 속성은 사랑입니다. 공의만큼 사랑도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이라 부를 뿐만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으로도 부릅니다. 사랑은 원수도 갚지 말고 일흔 번 씩 일곱 번 용서하는 것입니다. 겉옷 달라면 속옷도 주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마침내 친구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본체시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됩니까? 공의를 내세워 모든 죄인들을 다 심판하자니 사랑에 저촉이 되고, 사랑을 내세워 죄인들을 무조건 용서하자니 공의에 걸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공의를 관철하면 사랑을 범하게 되고 사랑을 관철하면 공의를 범하게 됩니다.</p>
<!-- paragraph:p0008 -->
<p>그런데 하나님의 제 3의 속성이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를 지혜서라고 하는데 이것의 대 전제가 ‘하나님 경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하는 십자가라는 해법을 착상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관철하시며 우리를 완벽하게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결코 의인으로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유사 이래 철저하게 저주받아 죄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절규하시며 그러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아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철저하게 주님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허물을 호리도 남김없이 응징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고 했고, 세례 요한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의인이 아니라 천하에 둘도 없는 죄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그렇게 죽이심으로써 공의를 관철하셨고, 한 분을 죽이심으로써 전 인류를 구원하셨기에 사랑을 관철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발상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두 개의 기둥이 교차되어 있습니다. 수직 기둥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수평 기둥은 하나님의 가이없는 사랑입니다. 종과 횡으로 이루어진 십자가를 보시며 공의와 사랑의 교차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로 착상된 것입니다. </p>
<!-- paragraph:p0009 -->
<p>그렇다면 이러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법에 보면 양이나 소나 염소 같은 희생제물 한 마리가 한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데, 어째서 한 분 주님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을까 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9장 13절 이하입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렇습니다. 짐승의 피와 주님의 보혈은 비교불가입니다. 하나님께는 전 인류와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주님이십니다. 독생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주님 한 분의 가치가 하나님께는 대단합니다. 주님의 피는 전 인류를 대속하고도 남습니다. 우리 전 인류의 죄값과 주님의 핏값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주님의 핏값이 우리의 죄값보다 더 크기에 가능했습니다. 만일 우리의 죄값과 주님의 핏값이 같았다면 부활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p>
<!-- paragraph:p0010 -->
<p>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연출한 인간 구원의 드라마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전히 관철된 구속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전하지 않겠다고, 자랑치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고백이요 다짐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요 다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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