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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m: 無로부터의 창조(창 1:1-5) 환경주일

2010년 6월 6일 주일낮예배/환경주일
본문: 창 1:1-5
제목: 무로부터의 창조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과학자는 빅뱅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사람도 진화론자의 얘기처럼 무생물에서 생물로, 바이러스에서 박테리아로,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유인원에서 사람으로 진화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교리적으로는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합니다. 라틴말로 creatio ex nihilo 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던 재료를 모으고 조합해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게 아니라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무(無)가 아니라, 절대 무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본문 3절 이하입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절대 무(無)에서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면, 창세기 1장 3절 앞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까? 2절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절대 무로부터의 창조 맞습니까? 창세기 1장 3절 이전에 2절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절대 무와 상대 무 개념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 무에서 곧장 3절로 가신 게 아니라 2절 곧 상대적인 무(無)를 경유하셨다는 겁니다. 절대 무 상태에서 창조사역을 착수하셔서 2절의 상대 무 상태를 경유했다는 겁니다. 2절은 상대적인 무(無)입니다. 이미 빛이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어둠이 있으니까 빛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크 온 곧 절대 무에서 메온 곧 상대 무를 경유한 후 빛을 창조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 문제입니다. 우주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절대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 심지어 시간과 역사까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도 분명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자식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심장도 하나님의 것이고, 자연도 환경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절대 인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자연을 인간에게 맡기며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리자, 곧 청지기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폭군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보호하고 보존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소유권이 아니라 관리권을 위임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의 뜻에 따라 자연을 잘 돌봐야 합니다. 주인 행세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월권입니다. 내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위탁된 달란트입니다. 생명도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라도 회수하시면 누구도 거역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태초에 절대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소유권을 바르게 인식하며 자연과 환경에 대한 투철한 청지기 의식을 갖고 사는 것은 우리 인생의 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인인 듯 착각하며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 동산의 관리인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월요일은 바다의 날이고 오늘은 환경주일입니다. 생태학적 파국이 우리 발등에 떨어진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서적 의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연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다음은 우리의 정서와 본능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무 곧 허무에서 왔습니다. 윤회설을 믿는 교도들은 전생에서 우리가 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든 중생이 3계 6도를 윤회한다고 믿습니다. 각자의 업보에 따라 돌고 돕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전생이 아니라 절대 무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원초적인 정서 가운데 이 무(無)에 대한 향수, 동경이 있습니다. 연어만 회귀본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코끼리에게만 귀소 본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원적지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실향민은 고향을 잊지 못합니다. 명절 때 마다 일어나는 민족 대이동을 보십시오. 이것은 사회학적 현상 이전에 원초적인 본능이 숨어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무(無)에서 왔기 때문에 무(無)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불안은 무엇입니까? 불안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불안이 무서운 것은 두려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물리적입니다.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만 제거하는 끝납니다. 불안은 막연히 우울하고 두려운 겁니다. 대상이 없습니다. 견딜 수 없이 외로운 겁니다. 폴 틸리히는 이 불안을 존재론적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불안의 실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허무가 나를 유혹하고, 위협합니다. 이게 불안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없는 겁니다. 구체적인 실체가 없기에 두렵고 무서운 겁니다. 불안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리고 그러다가 허무에 자신을 투신하는 겁니다. 자살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자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 잠재적인 자살자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허무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봉독한 창세기 1장 2절을 보십시오. 이게 절대 무가 아니라 상대적인 무(無) 상태인데도 혼돈, 공허, 흑암, 깊음이 나옵니다. 여기에 빠지면 헤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나를 유혹하는데 이게 불안이고, 이 불안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태가 우울증이고, 더 이상 헤어나지 못하면 자살하는 겁니다. 경찰청에서 발표한 작년 자살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하루 평균 34명이 자살했습니다. 42분마다 한 명이 자살한 겁니다. 

어떻게 하면 자살을 막을 수 있습니까? 자살의 주범인 불안과 우울증으로부터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허무로부터의 향수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 대한 욕구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종교심입니다. 이게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아버지에 대한 향수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동경하다가 곁길로 빠진 게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을 경계선상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절대 무에서 왔기에 허무에도 참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존재에도 참여한다는 겁니다. 한 발은 허무에, 한 발은 존재에 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디로 기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 1권 서두에서 ‘인간은 누구나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절대 평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고백록의 전체 주제입니다. 담배 피거나 술 마시거나 마약할 때, 순간적으로 불안과 공허를 잊을 수 있습니다만, 근본적인 해소는 아닙니다. 오직 참 존재이신 아버지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허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서 밝고 복되게 살아가십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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