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23m: 파라클레토스(요 16:5-14) 성령강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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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3일 주일낮예배/성령강림주일
본문: 요 16:5-14
제목: 파라클레토스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40일간 지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성령이 임하십니다. 오순절을 기해서 120명의 성도가 함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이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한 본문 7절을 보면 “보혜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님이 성령에 대해 명명하신 호칭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독특한 성령에 대한 칭호입니다. 보혜사는 한자말인데, 직역하면 은혜를 베풀어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스승이란 말입니다. 원어로는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말은 합성어인데, 파라와 클레토스의 합성어입니다. 파라는 곁에 라는 말이고, 클레토스는 부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파라클레토스는 내 곁으로 부름받아 나를 돕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중보자, 변호자, 권면자 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주님이 성령에 대해 이렇게 명명하신 겁니다. 맞습니다. 성령은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우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밀착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만만치 않습니다. 보혜사이신 성령의 도움 없이는 누구도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의 존재가 절대적이고 충만이 필수적입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복음시대는 성자시대이고, 교회시대는 성령시대입니다. 성령이 모든 것을 관장하십니다. 교회도 성도 개개인도 다 성령이 간섭하시고 성령이 인도하시고 강제하십니다. 주님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꼼짝하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아버지의 약속하신바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성령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셔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우리가 해 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혜사이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며 무엇을 돕는다는 것입니까? 우선, 성령은 믿음을 돕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도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누구도 예수를 나의 주라 고백할 수 없다는 겁니다. 본문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3절도 보십시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도, 누구도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릅니까?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제 정신으로는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성령의 씌어야 합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믿게 하고, 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세계에 대한 감이 옵니다. 내 의지로 신앙생활하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낙향했습니다. 그들은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을 기해 성령을 체험한 다음에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물불 안 가리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자기들의 힘이나 의지, 용기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성령의 강제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순교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떡을 줍니까? 돈을 줍니까? 주일날 전쟁하듯 교회 나와 봐도 은혜는커녕 시험에 들고 마음 상해서 집에 돌아갑니다. 목회자는 그나마 돈을 받으며 믿는데, 여러분은 돈을 내면서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나와있습니까? 성령이 강제하셔서 그렇습니다. 나는 가정의 평화 때문에 나와 준 것이라고 해도, 그 정도도 성령이 강제하셔서 그렇습니다. 죽인다고 해도 신앙생활은 내 의지로 안 됩니다. 부디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 잘 지키시고 신앙생활에 더욱 진전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둘째,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돕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기도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얼마나 몰랐으면 성령이 말할 수 없이 탄식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시(詩)는 잘 써도, 정작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품목을 살펴 보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해치는 흉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 부질 없고 헛된 것을 구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대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꿰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엉터리로 기도하지만 지금 이렇게 멀쩡한 것은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는 성령 덕분입니다. 성령충만하셔서 중언부언하고 횡설수설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령은 우리의 삶을 돕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께서 내 삶을 도우시기에 현실적으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면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도 다 아름다운 선으로 결말이 납니다. 나는 일을 잘한다고 애를 쓰나 항상 일을 망칩니다. 그런데 성령이 모든 것을 선이 되도록 조합해주시고 수습해 주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내가 일을 망쳐도 결국 성령이 보혜사가 되셔서 일을 수습해서 아름다운 결말을 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이하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성도도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그래도 질그릇에 담긴 성령 때문에 아무리 우리를 거꾸러뜨려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충만했던 사도 바울의 생생한 간증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돕고 보호하고 인도하시는데,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해치고 대적하며 끝내 유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필히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현실은 성령충만합니까? 성령의 충만함으로 우리가 성공할 수 있는데, 우리가 성령충만한가 라는 겁니다. 성령충만은커녕 우리는 자꾸만 반대로 갑니다. 성령충만의 반대는 성령훼방입니다. 성령소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 마가복음 3장 28절 이하, 에베소서 4장 30절을 보면 다 성령을 소멸치 말고, 근심하게 하지 말고, 훼방치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 성령을 소멸하고 훼방하고 근심하게 한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입으로는 성령충만을 바라나, 실제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훼방하고, 소멸하게 하며 삽니다. 이게 우리 신앙생활의 모순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과 유대가 깊어야 합니다. 성령과 온전한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성령을 묵살하고 소외하고, 그의 역사를 훼방하고, 성령의 계시와 감동을 애써 외면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떠나가시면 이것을 성령소멸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성령의 은혜로 이뤄지는데, 성령이 나를 떠나시면 나는 천애의 고아가 되고 망하는 겁니다.
성령훼방, 성령소멸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말합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에 대해 무심하고, 그의 역사에 대해 둔감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우리는 걸어다니는 성령의 전입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이미 내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해 우리가 무지하고 무심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지한 겁니다. 내 안에 이미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하든 일단 신앙생활이 성립됩니다. 예수를 향해 주(主)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찬송을 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심해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함을 모르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깨우침과 감동을 주는데도 우리가 둔감해서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성령훼방입니다. 신앙생활이 10년 되었다면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신지 10년이 된 겁니다. 내가 의식하지 못했고 무시했고 내 영성이 투명하지 못해 성령을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성령에 대해 둔감하고 그 존재에 대해 무심한 삶을 회개하십시다. 내 안에 계신 성령과 긴밀하게 교제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다는 것은 내 영성이 탁해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죄에 쩔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교감이 안 이루어지는 겁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 고집과 의지대로 하는 것은 성령훼방입니다. 이게 성령을 훼방하며 사는 것의 전형입니다. 이것은 무지보다 더 악성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면서도 짓누르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에 예민하게 응답하면 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로 피곤해지기 때문입니다. 불편하고 괴로워서 성령의 감동을 무시합니다. 성령이 아니라 자기 입맛대로 사는 삶이 성령훼방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내 악한 의지가 성령의 역사를 극복해 버립니다.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삶입니다. 성령은 지정의의 본체십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삶은 고상하고 인격적이고 예수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그런데 비신사적으로 비열하게 처신하고,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 성령모독입니다. 성령충만하다고 하면서 온갖 이상한 짓을 다하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인격적입니다. 결국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비신사적으로 살면, 성령을 모독하는 겁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 나가 엉뚱하게 사는 것은 성령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는 성령을 훼방하지 맙시다. 성령을 소멸하지 맙시다. 내 안에 계신 성령에 무심하지 마시고, 그 역사와 감동에 반응을 보이고, 그의 인격성을 내 삶을 통해 구현합시다. 이것이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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