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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5m: 현실 교회(마 16:16-20) 창립기념주일

2010년 4월 25일 주일낮예배/창립기념주일
본문: 마 16:16-20
제목: 현실 교회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잘 아시는대로 오늘 본문은 오늘날까지도 가톨릭과 우리 개신교가 대립하며 논쟁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이 말씀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수령입니다. 18절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어지는 19절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가톨릭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 위에 그렇게 세우겠다고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개인 베드로에게 주신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천국 열쇠가 교황을 통해 오늘까지도 계승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교황의 존재가 절대적입니다. 교황 위에 교회가 있으니까 교황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거기에서 교황무오설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 본문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인간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이 바로 반석이고 교회의 기초라는 겁니다. 또 천국 열쇠도 주님이 인간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게 아니라 교회에 주신다는 약속으로 해석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에 주님이 하늘 문을 여닫는 열쇠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한 가지 사실은 같은 견해를 취합니다. 교회의 기원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세운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에 의해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이런 전제를 갖고서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규정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명제에서 우선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현실 교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9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교회는 병든 사람 곧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이고 3년간 머물며 목회했던 에베소 교회가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3년이나 머물었던 교회는 에베소 교회가 유일합니다. 그만큼 공을 들인 겁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이렇게 책망합니다.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거짓을 말하고, 분을 내고, 심지어는 도적질하는 사람도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겁니다. 상소리하고 뒤에서 남의 흉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실망스럽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이게 예나 지금이나 적나라한 현실 교회입니다. 의인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이니 그 안에서 무슨 일인들 안 일어나겠습니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교회에서 천국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고 실망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이 세상에 천국 같은 교회는 없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교회는 병원 같은 곳입니다. 죄인들이 와서 주님의 사랑으로 고침을 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멀쩡한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냉정하게 해야 합니다. 막연하거나 자기 상식이나 기대로 교회를 바라보면 다 시험에 듭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도 이 교회 저 교회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지만 의인들의 공동체라는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인이어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의인이라 불러주는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분명 죄인인데 하나님 눈에 의인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역설이고 변증법입니다. 정확하게는 우리는 다 죄인인데, 주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았기에 의인입니다. 주님의 대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입니다. 이 교리(dogma), 역설(paradox)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는 이것을 칭의(稱義, Justification, Rechtfertigung)라고 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죄값을 물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입니다. 이 변증법(dialectic)을 알아야 자유한 신자가 됩니다. 

둘째로 교회는 노아의 방주입니다. 2-3세기 교부인 이레네우스, 터툴리안이 이미 그렇게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4세기의 어거스틴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물 심판 계시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이 일러주신 대로 방주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가 만든 방주는 결코 작은 방주가 아닙니다. 우리 서해 바다에서 침몰한 천안함보다 더 큽니다. 노아의 방주는 딱 축구장 사이즈 정도입니다. 연면적으로 보면 노아의 방주는 3층이니까 축구장 3개 규모의 유조선처럼 생겼다고 보시면 됩니다. 노아가 이처럼 큰 배를 어디서 만들었냐면 산속에서 만들었습니다. 잣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소는 다 바닷가에 있습니다. 그래야 쉽게 배를 진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깊은 산속에서 배를 지었습니다. 120년간입니다. 일생동안 배를 건조한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노아를 조롱했겠습니까. 산속에서 배를 만들고 있으니 완전히 미친 사람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배를 만들고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장차 닥쳐올 홍수 심판을 이해시킬 수 없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요즘도 우리가 전도할 때 어려움을 겪는 게 바로 이겁니다. 예수 믿으면 당장에 좋은 일이 생기거나,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를 믿으면 좋은지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의 불의 심판이 있을 테니 빨리 구원의 방주인 교회에 들어오라고 하려니 교회가 그렇게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도 그랬습니다. 1층과 2층에는 각종 동물을 태웠고, 3층에는 노아의 가족과 1년간 먹을 사료와 양식을 비축했습니다. 창은 위로 뚫린 창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안에서 온갖 동물과 사람이 무려 1년을 살았으니, 먹고 싸고 지지고 볶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싫다고 창을 열고 방주를 나왔다면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비좁고 냄새나고 시끄러웠지만 1년간 참고 버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곳입니다. 온갖 사건과 모순이 발생합니다. 교회는 천사들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더도 덜도 아닌 노아의 방주가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냄새나도 참으시고 답답해도 견디십시오. 방주는 구원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 땅에 40일간 계시다가 최후로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입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보면 우리말로는 동사로 보이는 단어가 몇 개 나옵니다. 우선 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원어로 보면 제자를 삼으라는 단어만 명령형입니다. 이게 주님이 최후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분사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단어들은 제자를 삼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궁극의 사명은 ‘제자 삼는 일’입니다. 제자 삼지 않는 교회만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식당 간판 붙여놓고 밥을 팔지 않으면 간판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119전도 캠페인, 화요전도대회, 2015프로젝트에 힘쓰는 것도 교회의 기본책무인 제자를 삼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창립 15주년이 되었음에도 아직 미약합니다. 우리가 제자 삼으라는 책무를 방기한 탓입니다. 먼저 믿은 자의 사명이 바로 제자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빚진 자들입니다. 전도는 특별한 사람이나 별난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업, 직장, 학업이 궁극적으로는 제자 삼는 일로 귀결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 버는 목적도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재주, 가족, 건강은 다 제자를 삼는 데 투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향한 선교 공동체의 사명을 다합시다. 다시 한 번 이점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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