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080312w:사순절 강해 1(눅 19:41-44)

2008년 3월 12일 수요성경공부 고난주간 본문 강해
본문: 눅 19:41-44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성밖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신 장면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신 기록은 몇 차례 나옵니다. 지난 주일 낮에 함께 상고한 나사로 본문에서 그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우셨습니다. 땅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린 것뿐 아니라 우셨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직전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눈물은 가장 친한 친구를 생각하며 우신 우정의 눈물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신 눈물은 인류 구속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신 눈물은 애국애족의 눈물입니다. 민족의 현실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움과 한심함을 이기지 못해 우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부패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을 보면 주님은 여기에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당시 예루살렘은 정치, 종교의 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외세에 붙어 야금야금 나라를 팔아 먹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기득권 수호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구약의 아모스는 공의와 정의를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데, 주님 당시의 예루살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패가 썩은 강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온 나라를 흘렀습니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는데 지도자들은 당파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날마다 지역감정과 비리를 부추겨 북부 갈릴리, 중부 사마리아, 남부 유다 지방 사람들이 서로 원수로 지냈습니다. 피차 간의 골이 얼마나 깊었던지 서로 왕래도 힘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영호남 지역감정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각 지역을 지배하던 분봉왕들은 민생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권력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쥐어 짜내 로마에 조공을 바치기에 급급했습니다. 바로 이런 지도자들에 대한 주님의 질책은 무서웠습니다. 언제나 혹독했습니다. 헤롯을 가리켜 ‘저 여우’라고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습니다. 회칠한 무덤, 외식하는 자들.... 이 모든 말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고발입니다. 그러시다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보시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개선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안타까우셨겠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만약 우리나라를 바라보시며 내일 모레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서울을 바라 보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우실까요 웃으실까요? 이번 새정부의 인사청문회를 보셨지요. 우리 사회 지도층들의 그 수준이 어쩌면 그리도 한심합니까. 차리고 나서면 멀쩡한데 뒤를 파보면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스후 라는 MBC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그들의 도덕적 수준은 욕먹어 마땅합니다. 모범적인 구석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아직도 주님은 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다 그런데 우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현실을 걱정하며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눈물은 주권을 잃은 민족의 장래를 우려하는 눈물입니다. 42절입니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주권을 잃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우려입니다. 평화문제입니다. 주님 시대를 기점으로 지난 천 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평화에 대한 눈이 멀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931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다가, 후에 바벨론과 앗수르에 의해 남북왕국이 망했습니다. 그 이후 한 번도 독립된 주권국가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천 년입니다. 어디 이것뿐입니까. 예루살렘은 주님이 승천하신이후 로마군에 의해 주후 70년에 풍비박산이 납니다. 44절 말씀 그대로 입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로 흩어져서 2000년 동안 유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히틀러에게 600만이 살육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다 주님의 권고를 받지 않은 죄값입니다.

언젠가 황장엽 씨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남한에 와보니 자신의 솔직한 느낌이 남한은 병이 들대로 든 사회고, 북한은 미칠대로 미친 사회라고 했습니다. 남북한을 다 살아본 사람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남북이 막상막하라는 겁니다. 지금 한반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딱하고 울어도 시원찮을 나라는 없습니다. 어제 프로그램에서 탈북자들의 실태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지구상에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데 우리의 말과 글을 쓰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것이 작은 반도 저 한 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국경이 없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자기 민족의 역사에 대한 방관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절망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도피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민족의 문제를 끌어안고 운 것처럼, 주님이 이스라엘의 현실을 바라보시며 우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민족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과 같은 눈물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따르며 우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눈물을 배웁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에 이르는 길가에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600만을 기념하여 600만 그루의 가로수를 눈물로 심었습니다. 지금도 통곡의 벽을 부여잡고 울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념관에는 히틀러가 사람의 몸을 짜서 만든 비누까지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이 나라 역사를 걸머지고 주님 뒤를 따릅시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위에서도 속히 이루어지기를 눈물로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사순절을 보내며 다짐하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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