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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8일 주일낮예배</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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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본문: 요 21:3-17</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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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제목: 회복</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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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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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본문 3절을 다시 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베드로를 위시한 몇몇 갈릴리 출신 제자들이 낙향을 해서 옛 직업인 어부로 되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때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최소한 두 번 이상 부활하신 주님을 뵌 후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인 20장 19절 이하입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첫 만남입니다. 두 번째는 지난 주일 본문인 20장 26절 이하입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것이 두 번째 만남입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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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생하게 두 번이나 체험을 했음에도 어떻게 옛 직업으로 되돌아갔습니까?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서 입니까? 주님에 대한 회의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 때문에 낙향한 겁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자신의 실패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뵐 면목도 없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뻐함으로 자신의 상처를 털어내기에는 그 상처가 컸습니다.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는 데까지도 가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개 여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물론 닭소리를 듣고 나가서 회개하고 통곡했습니만, 그 상처가 쉽게 아물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치명적인 우울증에 빠져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주님을 만나는 장면인데도 그는 옛 직업을 고수했습니다. 나 같은 인간은 갈릴리에서 물고기나 잡으며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자학증에 빠진 겁니다. 그런데 고기잡이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허탕만 치고 새벽에 철수하려는데, 그 바닷가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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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3년 전 베드로가 처음 주님의 소명을 받을 때도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그때도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내렸더니 두 배에 가득 차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3년 전 그 첫 사랑의 장소에 다시 나타나신 겁니다. 소명 때와 똑같은 상황을 연출하시며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하신 겁니다. 주님은 숯불을 피우고 떡을 굽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식사를 마치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을 반복해서 질문하십니다. 왜 세 번 질문하십니까? 베드로가 숯불 가에서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은 한 영혼을 치유하시는 고도의 영적이고 심리적인 처방입니다. 당시 주님은 사랑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것을 물어 볼 수도 있었습니다. 어째서 나를 부인하고 저주하며, 도망쳤느냐? 왜 낙향하고 옛 직업으로 돌아갔느냐? 그러나 주님은 오직 하나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첫 사랑이 회복되어야, 주님과의 원초적 관계가 복원되어야 아픔도 상처도 사명도 소명도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늘 우리에게 묻고 확인하고 싶은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재주가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사랑을 물으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언제나 주님에 대한 초심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대개 첫 사랑에 실패합니다. 첫 사랑과 결혼하는 케이스는 드뭅니다. 그런데 주님은 유난히 첫 사랑에 집착하십니다. 항상 첫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기대하십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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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짚어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사용한 어휘입니다. 또 베드로가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고 할 때의 그 어휘가 다릅니다. 우리 성경에는 사랑이라고 똑같이 나와 있지만 원문은 다릅니다. 주님이 물은 사랑과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은 다릅니다. 그리스 말은 사랑에도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 아가페, 스톨게, 필레오, 에로스가 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신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 무조건적 사랑,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내가 당신을 필레오하는 줄 당신이 아신다’고 대답했습니다. 필레오는 인간적이고 상대적인 사랑, 선택적인 사랑입니다. 친구 간의 우정이 필레오입니다. 부모 자식 간의 혈육적 사랑이 스톨게이고, 남녀 간의 사랑이 에로스입니다. 우정 같은 사랑이라고 베드로는 대답한 겁니다. 필하모니라는 말은 음악에 대한 사랑, 필라델피아는 도시 사랑입니다. 필로소피는 지혜에 대한 사랑 곧 철학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를 확인하고 싶으셨는데, 베드로는 아가페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전 같았으면 아가페로 대답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며 주제 파악을 한 겁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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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님은 두 번까지만 아가페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두 번 다 필레오로 대답하니까, 이제 주님이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왜 주님이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를 철회하시고, 상대적인 사랑, 우정 같은 사랑으로 물으셨을까요? 주님이 양보하신 겁니다. 주님이 사랑의 단수를 낮춰 베드로의 눈 높이에 맞추신 겁니다. 아가페가 도저히 자신이 없느냐? 그러면 필레오 수준으로 내가 내려가마, 접수하마 하신 겁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당신이 아시매 내가 필레오하는 줄 당신이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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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주님의 이 엄숙한 물음에 서야 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든, 그동안 얼마나 주님을 모른다 부인하며 저주했든지 나를 찾아 오신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를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아가페는 자신이 없으나, 필레오로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면목이 없고 부끄럽지만 필레오는 제가 할 수 있습니다’고 주님 앞에 대답하셔야만 내 상처가 치유되고, 내 사명과 소명이 복원되고, 내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베드로도 제자들도 이 사건을 계기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불같은 생을 살다가 영예로운 순교자가 됩니다. 첫 사랑을 되찾고, 초심을 회복하는 성도 되시길 기원합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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