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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8일 주일오후예배</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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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본문: 요 11:1-11</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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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제목: 회생</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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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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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당시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의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가장인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게 된 겁니다. 그래서 급하게 사람을 주님께 보내 놓고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끝내 주님은 나타나시지 않고, 오라버니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장례까지 다 치르고 난 후 두 자매는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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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가정에 왜 이런 불행이 일어났을까 하는 겁니다. 나사로의 가족은 평소 자기들이 주님의 남다른 총애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주님께 기별했습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주님도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럼에도 주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그냥 죽게 내버려두셨습니다. 빨리 오셔서 도와달라는 우리의 다급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서두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21절을 보면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하며 마르다가 원망을 쏟아냅니다. 빨리 왔더라면 오라버니가 안 죽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32절을 보면 마리아도 원망섞인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게 다 주님에 대한 그들의 아쉬운 감정을 드러낸 겁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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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자주 이렇게 주님을 원망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셨더라면 이런 슬픔, 실패는 겪지 않아도 됐을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과 판단과 계획은 분명 나의 생각이나 판단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나의 기도나 호소에 침묵하고 계실 때, 응답을 유보하고 계실 때 잘 견디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6절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하시고도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계신 겁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기 보다는 고의로, 아니면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시면서 거기에 그냥 계셨던 겁니다. 그러다가 나사로가 정작 죽었다고 하니 죽은 게 아닐 잠들었다고 하시며 깨우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어떤 필요 때문에 늑장을 부리신 겁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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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신앙적인 것일까요? 주님이 얼마든지 빨리 오실 수 있음에도 늦게 오시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태가 악화되고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주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아프던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도 아직 살아있을 때, 주님의 기적을 기대합니다. 숨 끊어지면 사태가 끝났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직 아니십니다. 주님의 끝은 아닙니다. 11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죽어서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인데 그제서야 주님은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상황은 이미 끝났는데, 주님은 이제 출발하십니다. 주님께는 죽음도 죽음이 아닙니다. 그냥 잠자는 겁니다. 우리 생각과 주님의 판단이 얼마나 다릅니까. 주님은 죽은 사람도 얼마든지 흔들어 깨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 나사로가 잠자니까 깨우러 가자고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죽었다고 포기하는 것은 주님의 권능을 과소평가하는 겁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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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왜 죽은 사람을 주님이 못 살리실까요? 우리의 불신앙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었다고 더는 주님을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라버니를 이미 장례했다고 해도 기어이 주님을 무덤 앞에 세우면 여전히 요즘도 주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39절 이하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왜 냄새나는 시체를 끄집어내려고 하십니까? 라는 겁니다. 마르다의 반항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무색케 하시고 사태를 수습해서 나사로로 하여금 무덤에서 걸어나오게 하십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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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도들은 그게 어떤 아픔과 낭패든 그것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4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또 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병이란 고통이나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겁니다. 실패도 아픔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겁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도 이렇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아픔, 실패, 죽음을 주실 때는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마리아도 마르다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의 병이나 아픔, 낭패, 실패, 상처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우리 중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실패, 아픔, 고통,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항상 주님께 누를 끼치고 있지 않습니까. 불행이나 아픔이나 실패까지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성공을 주시면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합니다만, 실패를 주시면 우리는 절대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떤 현실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현실을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도 죽음도 우리에게 복이 되고 주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현실에 대해 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바르게 응답하지도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행복만이 아니라 자신의 불행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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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기억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참담한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다 알고 보고 계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 때도, 기도 응답이 없어 내가 미치도록 답답해 할 때도 주님은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숨지 않으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폐부를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이쪽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나사로가 숨을 거두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주님은 멀리 계셨지만 나사로의 사정을 다 지켜보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아픔, 낭패, 시련, 시험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아니 알고 계실뿐만 아니라 나와 아픔을 함께 겪고 계십니다. 35절을 보면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의 슬픔에 울어주고 계십니다. 차라리 나보다 내 현실을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절대 강 건너 불구경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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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참고 기다리십시오. 주님의 처분이 떨어질 때까지, 주님이 현장까지 오시기까지 기다립시다. 반드시 주님은 오셔서 손을 쓰십니다.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무덤에 장사했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체가 썩어 냄새나니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비로소 그 때에야 베다니로 오십니다. 25절 이하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물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물음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겁니다. 부디 부활이신 주님, 생명이신 주님을 확신하셔서 여러분이 기도하고 바라는 모든 것 다 이루고, 죽은 오라버니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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