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4m: 부활의 비밀(고전 15:51-53)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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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4일 주일낮예배/부활주일
본문: 고전 15:51-53
제목: 부활의 비밀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적어도 우리 교회 성도들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난 걸 뜻하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한 게 아니라 소생, 회생한 겁니다. 나인성 과부 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모두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이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생(復生)입니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입니까? 51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부활의 비밀은 말해주겠다는 겁니다. 마지막 나팔은 이 세상 종말을 고하는 천사들의 나팔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나팔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주님의 재림의 나팔이 울릴 때 홀연히 변화되는 사건이 부활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부활이 아니고, 변화가 부활의 핵심입니다. 변화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골자입니다. 우리도 다 변화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우리는 주님 재림 때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도 변화되는 사건이 부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됩니까? 죽은 자들은 살아나면서 변화되고, 살아있는 자는 산 상태에서 변화되는 게 부활인데, 어떻게 변화된다구요? 53절입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것이 부활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부활한 게 아닙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부활한 게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부활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나 여생을 살고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영원히 안 죽은 게 아닙니다. 이런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겁니다. 두 번 다시 썩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 만이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주님 앞서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많았음에도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인 이유는 다시 죽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에서 중요한 것은 다시 살아난 게 아니라 변화입니다. 부활체 곧 신령한 몸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영원히 삽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이 몸으로는 안 됩니다. 다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하나님의 창조 때는 완전한 몸이었으나, 우리가 범죄한 이후 남이 나를 해치고, 내가 남을 해친 몸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완전한 몸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이라고 하면 변화가 되긴 되는데, 그때는 완전해 집니다. 그때는 루저(looser)가 없습니다. 완전해지며 완벽해 집니다. 누구도 육체적인 결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입니다. 부활에 관한 모든 말씀이 여기에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 장만 잘 이해하면 부활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여러분의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35절 이하입니다.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우리가 부활체로 변화되면 마치 씨앗이 꽃으로 변하듯 변한다는 겁니다. 코스모스 씨는 손톱 깎아 놓은 것 같은데, 이게 자라면 너무도 청순한 꽃이 됩니다. 완전히 다른 실체가 되는 겁니다. 나팔꽃은 쥐똥처럼 생겼는데, 이게 꽃이 되면 얼마나 여리고 아름다운 꽃이 됩니까. 씨만 보면 나팔꽃이 상상이 안 되지만 그 씨앗에서 나팔꽃이 피는 겁니다. 이렇게 신비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달걀과 노란 병아리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렇게 변화되는 겁니다. 굼벵이와 매미, 애벌레와 나비를 비교해 보십시오. 본질은 같습니다만, 그런데 그 형체가 변하는 겁니다. 애벌레에서 나비를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이를테면 지금 우리는 나팔꽃 씨앗이고, 애벌레고, 굼벵이인데, 부활체로 변하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겁니다. 42절 이하입니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부활은 죽을 몸을 심어 죽지 않을 몸으로 변하는 겁니다. 썩을 몸을 심고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변하는 겁니다. 욕된 것을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하는 겁니다. 육신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 곧 부활체도 있다고 합니다. 보기에 흉한 몸이 있은즉 보기에 심히 아름다운 몸도 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부활체의 유비(analogy)를 찾으라는 겁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부활하신 주님의 몸처럼 변합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몸이 어떠했을까는 신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신비한 몸이었습니다(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엠마오 제자에게 나타나실 때). 그럼에도 나는 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을 드셨습니다. 신비한 그런 몸으로 우리가 변화됩니다. 그런 몸으로 변화되어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인간관계도 가족관계도 재편됩니다. 물론 저 사람이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였다는 의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완전히 재편됩니다. 지금은 몇몇 사람만 내 가족이지만 부활한 후면 완전히 새로운 질서로 재편됩니다. 갈등이나 아픔이 없는 그런 관계로 다 바뀝니다.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질서로 재편됩니다. 부활의 관계로 재편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염려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관계로 바뀔 것입니다.
한 번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주님께 나와서 부활을 말하는 주님을 망신주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한 여인이 7형제의 맏이와 결혼했는데, 그 남편이 자식 없이 죽었고, 그래서 유대 사회의 관습법에 따라 둘째가 그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도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일곱째까지 결혼했는데 자식 없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이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부활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때는 시집 장가를 안 가며, 모두 천사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와 질서에서 나오는 모순이 다 극복되고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한 후에 옛 애인 만나거나 빚쟁이 만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활은 우리의 자연환경도 변화시킵니다. 땅도 하늘도 다 변합니다. 그래서 부활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땅과 하늘이 다 망가졌지만, 앞으로 부활의 세계가 도래하면 우리의 몸과 인간관계도 새로워지지만, 하늘과 땅도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땅으로 환원되는 겁니다. 우리의 영혼은 소위 천국을 갑니다. 그런데 부활 때가 되면 천국에 가 있던 우리의 영혼과 흙으로 환원된 우리의 몸이 다시 만납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부활체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나서 새롭게 변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삽니다. 엄밀히 말하면 천국은 초월의 세계입니다. 육신은 못 가고 영혼만이 가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영혼이 천국에 가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천국에서 사느냐면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까지 삽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부활체가 되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잠정적인 곳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재림 때까지, 부활 때까지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망가진 우주로는 안 되고,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불완전하고 훼손된 환경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걸 두고 새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우주로 변한 곳에서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영생하는 겁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그 세계를 이렇게 예언합니다. 11장입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렇게 부활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주님처럼 변화된 부활체로 영원히 사는 겁니다.
오늘 새벽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부활의 물고를 트신 겁니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주님보다 먼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있었으나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주님이 최초로 부활하신 겁니다. 첫 열매는 다음 열매의 보증입니다. 우리가 주님 다음 순서로 부활하는 겁니다. 주님이 부활 세계를 개막하신 겁니다. 주님의 부활이 부활 세대의 신호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열매입니다. 내 운명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신 겁니다. 주님의 부활 때문에 내가 구체적으로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된 겁니다. 나도 부활의 주자가 된 겁니다. 우리도 똑같이 주님처럼 부활합니다. 그래서 부활로 새로워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 소망을 우리가 가져야 신자입니다. 이 소망을 가져야만 고된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남들은 다 나들이 가는데, 우리는 여기 모여서 이게 뭡니까? 부활이 없으면 우리야말로 가장 손해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기꺼이 예배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다 주님이 보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신앙생활 못 합니다. 본전 생각나서, 피곤해서 못 합니다. 여러분의 심령마다 가정마다 부활의 산 소망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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