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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8m: 천국을 훔친 강도(눅 23:39-43) 종려주일

2010년 3월 28일 주일낮예배/종려주일
본문: 눅 23:39-43
제목: 천국을 훔친 강도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에는 당시 십자가가 세 개 세워졌습니다. 가운데는 주님이고, 좌우에는 두 강도가 달렸습니다. 니고데모 복음이라는 외경에는 이 두 강도는 가까운 친척지간인데 어릴 때 한 마을에서 자라며 온갖 못된 짓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이 살인강도로 붙잡혀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동안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저주하며 주님까지도 저주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십자가에 함께 달린 자들도 예수를 조롱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두 강도는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이 순간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저주하고 예수를 비웃던 한쪽 강도가 돌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42절을 보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이 답하시기를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낙원은 천국입니다.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마지막에 극적인 회개로 천국을 가고, 다른 한 사람은 끝까지 조롱하며 저주하다가 지옥을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과 천국의 운명적인 기로에 주님의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막힌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생들의 지옥과 천국행을 가르는 분수령입니다. 십자가는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시금석이라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친척지간으로 한 마을에서 살아왔고, 똑같이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천국행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지옥행입니다. 이 세상에는 십자가를 믿고 천국 가는 사람도 있고, 끝까지 십자가를 저주하여 지옥으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3장을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노아의 홍수에 비유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노아 홍수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도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의 가족에게는 홍수가 구원의 방편이었습니다. 홍수가 멸망당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노아의 가족에게는 결정적인 구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편 강도는 철저한 마이너스 인생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랑자로 살아왔으니 주일성수는 고사하고 십일조며 기도 한 번 제대로 했겠습니까. 그가 한 게 있다면 못된 짓 하다가 숨넘어가기 전에 회개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놀랍게도 천국을 보장받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욕하고 세상을 저주하던 그 입으로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한 것뿐입니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천국을 훔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많이 부러워합니다. 투자한 것 없이 가장 경제적으로 믿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맘대로 세상을 살다가 죽기 30초 전쯤에 회개하고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산다면, 전도할 필요도 교회 나올 필요도 헌금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작 회개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손해가 아닌가 하며 억울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도처럼 막판에 극적으로 회개하고 천국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주일성수 한 번도 안하고 천국가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입니다. 하지만 이런 구원은 복된 구원이긴 하나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천국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 생활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판으로 회개하고 천국 가면 상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한 편 강도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진작부터 예수 믿은 자신을 손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훗날 천국에 가면 주님이 다 보상하십니다. 오히려 막판에 회개하고 극적으로 천국 간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일찍 회개하고 믿은 우리야 말로 복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어떻게 막판에 회심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렇다 할 동기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직후까지도 다른 한 편 강도와 마찬가지로 세상과 예수님을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강도는 자기 의지로 회심했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택한 하나님의 자녀이었기에 주님이 강제하셔서 회개하게 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반면에 지난주에 우리가 상고했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반대의 경우입니다. 그는 비록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처음부터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본색을 드러내고 주님을 배신하고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겁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사람은 주님이 반드시 강제해서라도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우리는 회개한 한 편 강도를 통해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강도가 얼마나 변하고 회개했습니까? 우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주님을 욕하고 있는 다른 강도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놀라운 일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죄를 발견했습니다. 그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강도인데 왜 자기들만 죽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자기들보다 더 악질인 사람이 많은데 왜 우리만 십자가에 달려야 하느냐는 겁니다. 39절에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것은 당신이나 우리나 다 억울하니 당신과 우리가 함께 살자는 빈정거림입니다. 그러나 달라졌습니다. 41절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한 겁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주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베드로는 그 말씀을 따릅니다. 그런데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은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 줬다면 기뻐하며 감사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겁니다. 그는 주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을 발견한 겁니다. 주님의 빛 앞에서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겁니다. 죄 투성이고 모순 투성이인 자신을 본 겁니다. 이 강도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자기야 말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의 십자가 의미도 깨달았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똑같은 십자가지만 자기들의 십자가와 주님의 십자가는 다르다는 깨달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그는 엄숙한 부탁을 한 겁니다. 그러자 주님이 즉시로 구원을 보장해 주신 겁니다. 

회개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겁니다. 자신의 죄성을 의식하지 못하던 사람이 죄인이라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용납하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며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한 편 강도의 극적인 회개와 구원이 우리에게 결단하게 하고 깨달음을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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