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09m: 나사로야 나오라!(요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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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9일 사순절 다섯째 주일 낮예배
본문: 요 11:1-11
제목: 나사로야 나오라!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오늘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베푸시는 대목입니다. 굳이 이 기적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적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께서 지금도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고, 필요하면 기적을 베푸신다고 믿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난감한 일, 불가항력적인 일에 주님이 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 수습하시는 초자연적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도 다 기적을 믿으십니까? 아마 다 믿으실 줄 압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뭔가 이 성경에 나타난 기적과 관련한 불만이 있습니다. 기적이란 것이 대체 어떤 때에, 어떻게 해야 일어나는 것이기에 왜 내게는 안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로 할 때는 왜 성경에 나타난 기적이 안 일어나는가입니다. 기적을 안 믿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왜 내게는 기적이 안 일어날까요? 이게 왠 편견과 편애의 하나님이란 말입니까. 이런 불만은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습니다. 기적을 경험했다는 분이 주위에 얼마나 있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기적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이 내게 있어도 왜 기적이 내게 안 일어날까요?
기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는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구약 시편 40편 5절의 말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은 생각이 많으시기에 기적을 남발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판단하셔서 기적이 아니면 해결할 길이 없을 때 기적을 베푸십니다. 주님은 아주 신중하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주님께 기적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기적도 많고 생각도 많으셔서 우리가 아무리 애타도 우리에게 가장 덕이 될 때 기적을 베푸십니다. 왜냐면 자칫하면 기적이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같이 돈벼락 맞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불행해 집니다.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자식들이 다 이상해지는 예가 많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적을 바라고 기도하지만 주님은 마냥 침묵하고 계실 때, 이것이 답답하고 좌절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주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적 베푸시는 것을 자제하시는 겁니다. 사실상 우리는 기적을 감당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적을 베푸셔도 그것을 복으로 은혜로 승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인 오라비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급히 주님께 기별을 보냈습니다. 초조하게 마르다와 마리아가 기다렸습니다. 끝내 주님이 나타나시지 않아 오라버니가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주님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겠습니까. 장례까지 다 치르고 난 뒤에 주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르다의 가정은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가정이었습니다. 가정 단위로는 주님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나사로의 집만큼 예수님이 살아 생전에 자주 방문하신 집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오가실 때마다 항상 들르셨습니다. 3절입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뜻입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주님도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를 사랑하셨고, 그 사실을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주님을 기별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집에 갑자기 불행이 찾아왔을까요? 갑자기 생사람이 죽은 겁니다. 온 가족이 주위 사람들이 다 주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갑자기 불행이 닥쳐서 사람이 죽은 겁니다. 기별을 하면서도 당신이 끔찍이 사랑하는 오빠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인데, 그런데도 주님은 그 사랑하는 자를 죽게 버려두십니다. 빨리 와달라는 누이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주님은 서두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11장 21절을 보면, 느즈막히 오신 주님께 마르다가 원망 섞인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절을 보면 동생 마리아도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원망입니다. 우리도 자주 이런 원망을 합니다. 주님이 도와주셨더라면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았을텐데,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왜 나를 도와주시지 않아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하느냐고 주님을 탓합니다.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왜 남이 겪지 않는 이런 불행을 내가 겪어야 합니까. 도대체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며 원망합니다.
주님이 나의 기도와 호소에 침묵하실 때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주님께 욕을 보이게 됩니다. 6절을 다시 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나사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그 곳에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고의로 이틀을 더 머무신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로가 죽으니까 비로소 나사로가 잠들었다며 깨우러 가자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급하다고 할 때는 늑장을 부리고, 죽으니까 이제 깨우러 가자고 하십니다. 마치 죽을 때를 기다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점을 우리가 용납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서 늑장을 부리실까, 빨리 가야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바람입니다. 주님은 주님 나름대로 판단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까지 기다리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옳습니까?
첫째, 사태가 악화되어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주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죽으면 만사가 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마리아와 마르다는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깨우러 가자며 이제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시간과 주님의 시간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이 얼마나 다릅니까? 이미 시신에서 냄새가 납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데 주님이 그제서야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도 주님 앞에서는 잠자는 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잠은 다시 일어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가서 깨울 사람이니까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죽음 조차도 주님은 잠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덤에 장례했다고 포기하는 것은 주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기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11장 39절 이하를 보면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합니다. 이 때 마르다가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왜 부패한 시체를 꺼내려고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나흘이 지나서 부패한 시체도 얼마든지 그 무덤으로부터 불러내실 수 있습니다. 기적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실상 못 믿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는 시체를 다시 살려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벌써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냄새납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마시고 주님의 기적의 권능을 신뢰하십시오. 주님은 이런 자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적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믿음이 없습니다. 죽으면 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기적을 맞이할 채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어떤 낭패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4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또한 40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그리스도의 삶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실패도 시련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의 아픔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생사람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대와 바람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병이나 아픔, 낭패나 실패, 상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작은 아픔을 어도 하나님께 욕을 돌리면 돌렸지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우리의 아픔이나 기쁨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현실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광은 커녕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행복만이 아니라 자신의 불행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태어나면서 된 소경을 보고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할 때,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해석과 제자들의 해석이 얼마나 다릅니까? 부디 사랑하는 오라버니가 병들고 죽는 불행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브라함도 백세에 얻은 외아들을 잡아바치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 같으면 아예 하나님을 잡아 먹으려고 했을 겁니다. 온갖 저주를 다 퍼부으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났을 겁니다. 욥은 열 명의 자녀들을 다 잃었습니다. 백만장자의 재산을 다 날리고, 아내도 친구도 다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자기의 불행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모든 불행이 지나간 뒤 욥은 7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혹독한 시련은 내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에 다 실패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해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떠한 참담한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응답이 없어 내가 미치도록 답답한 상황도 주님은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지금 나사로의 집은 베다니이고, 주님은 지금 요단강 건너편에 계십니다. 10장 40절입니다: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그런데도 주님은 그토록 멀리 계심에도 지금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한 번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혹독한 풍랑과 싸울 때 주님은 산에 계셨습니다. 산 위에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멀리 산 위에서 기도하고 계시면서도 제자들의 비명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밤 4경에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과 낭패를 밝히 보고 계십니다. 주님 어디 계시냐고, 왜 내 사정을 몰라주시냐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 보다 내 형편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고독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모든 형편을 헤아리고 계십니다. 아니 주님이 내 모든 아픔을 함께 겪고 계십니다. 내 모든 사정을 함께 당하고 계십니다. 그 점을 확신하십시오.
35절을 보면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십니다. 이것은 쇼가 아닙니다. 내가 당하는 아픔과 슬픔을 함께 느낀다는 표시입니다. 차라리 주님이 내 사정에 대해 더 안타까워 하십니다. 주님은 절대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절대 아득히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늘 나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무덤에 장사지냈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 때 베다니에 오셔서 무덤 앞을 막은 돌을 치우라고 하시고, 이미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고 외치십니다. 25-26절입니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의 이 물음에 믿는다고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어떤 사정도, 형편도, 불행도, 시련도 주님이 기적을 통해 온전케 하시고 아름답게 회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주님의 기적을 다 체험하는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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