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id": "xe-2781",
  "title": "20100321m: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마 26:14-25)",
  "authors": [],
  "category": "sermon",
  "dates": {
    "registered_at": "2010-03-22T12:27:50",
    "original_updated_at": "2010-03-22T12:27:50",
    "published_on": null,
    "delivered_on": null
  },
  "tags": []
}
---
<!-- paragraph:p0001 -->
<div>
2010년 3월 21일 주일낮예배/사순절 다섯째 주일</div>
<!-- paragraph:p0002 -->
<div>본문: 마 26:14-25</div>
<!-- paragraph:p0003 -->
<div>제목: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div>
<!-- paragraph:p0004 -->
<div><br>
</div>

<!-- paragraph:p0005 -->
<div>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div>
<!-- paragraph:p0006 -->
<div><br>
</div>

<!-- paragraph:p0007 -->
<div>
<br></div>
<!-- paragraph:p0008 -->
<div>우리가 흔히 갖는 의문 가운데 하나가 주님은 과연 유다가 결국 자기를 배신할 줄 아셨을 텐데 왜 그를 제자로 삼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스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악역을 맡은 두 사람, 곧 가룟 유다와 빌라도에 대해 전향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악역을 담당해 줬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성사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두 사람은 주님의 구속사역에 진정한 동역자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명예회복, 범 교회적인 복권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억지요 왜곡입니다. 주님의 사역에 가룟 유다의 존재나 빌라도의 역할이 필요했다면, 왜 주님이 본문 24절에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은 가룟 유다나 빌라도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나 빌라도를 두둔하려는 그 어떤 움직임도 비성서적입니다.</div>
<!-- paragraph:p0009 -->
<div><br>
</div>

<!-- paragraph:p0010 -->
<div>
그러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했다면 좋을 뻔했다는 가룟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에 대해 우리는 잘 모릅니다. 개인 신상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어떤 경로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왜 주님을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했는지도 성경을 통해서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열두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열혈당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열혈당은 젤롯당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무력 봉기를 통해 외세인 로마를 팔레스틴에서 몰아내고 나라의 주권을 찾겠다는 극우 민족주의 집단입니다. 지금 팔레스틴 저항 조직인 하마스나 이슬람의 알카에다 또는 헤즈볼라 같은 게릴라 단체가 바로 열혈당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와 가나안인 시몬 같은 제자가 바로 그 열혈당 출신입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야심과 기대를 갖고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대다수 유대인들도 메시아가 오면 정치적으로 유대를 독립시킬 것이라는 바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제자들은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왕이 되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싸웠습니다. 심지어 요한과 야고보는 어머니를 동원해 청탁까지 합니다. 결국 그들은 끝까지 주님을 정치 군사적 메시아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보니 주님은 거사를 하실 생각은 안 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2절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자꾸 죽는다는 말씀만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가룟 유다는 좌절감과 배신감을 느낍니다. 한 마디로 속았다는 겁니다. 가짜 메시아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지체 없이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줄 터이니 얼마를 주겠냐고 합니다. 주님에 대한 깊은 실망과 좌절을 배신으로 보복한 겁니다. 그래 그렇지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3년간이나 따라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제자가 돈을 받고 스승을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가룟 유다의 인간성을 의심합니다. </div>
<!-- paragraph:p0011 -->
<div><br>
</div>

<!-- paragraph:p0012 -->
<div>
그는 양심이 지극히 불량했습니다. 본문 20절 이하도 최후만찬 장면인데, 주님이 제자를 둘러보시며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자, 제자들이 놀라 근심스러워 ‘주여, 내니이까?’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떡 그릇에 손을 넣으며 딴전을 부립니다. 떡으로 입을 막으며 그 순간을 피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그 속셈을 아시고 ‘지금 나와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 나를 판다’고 합니다. 그러자 시침을 떼고 다른 제자들처럼 묻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단한 강심장입니다. 개역성경보다 이번 개정판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랍비여, 설마 저는 아니지요?’ 이때는 이미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가 주님의 몸값을 흥정하고 은 30을 받았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은 30을 만지작거리며 ‘주님, 나는 아니지요?’라고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철면피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의 양심도 거듭나야 하는데, 3년간이나 주님을 따라 다닌다 하면서도 여전히 불량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팔고 맙니다. 어떻게든 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망가진 인격을 복원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도 실패했습니다. </div>
<!-- paragraph:p0013 -->
<div><br>
</div>

<!-- paragraph:p0014 -->
<div>
뿐만 아니라 그는 돈을 너무 밝혔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을 보면, 가룟 유다를 아예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 회계를 맡았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공금을 횡령했습니다. 그래서 도적이라고 한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 이하를 보면 한 여인이 주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흥분해서 그 여인을 책망합니다. 왜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이 장면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 향유를 왜 300데나리온에 팔아 다른 이들에게 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가룟 유다의 말입니다. 얼마나 계산이 빠릅니까. 척 한 번 보면 300데나리온이라는 감정가가 나옵니다. 그리고 얼마나 이성적입니까. 예수님 머리에 붓는 것보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훨씬 더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일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라 평소에 공금을 유용한 도적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치밀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세리도 있었습니다. 마태가 바로 세리 출신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회계 업무를 맡지 않고 가룟 유다가 맡습니다. 그만큼 그는 신뢰를 얻은 듯합니다. 제자들 가운데도 가룟 유다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깜쪽 같이 남몰래 공금을 횡령한 사람이 가룟 유다였습니다. 목사가 목회하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참는 것은 봉급 때문입니다. 스님이나 신부들은 독신이기에 그나마 괜찮지만, 목사는 가정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기에 돈에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에 집착하면 목회자는 끝장입니다. 평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가룟 유다 보십시오. 어떻게 3년간이나 동고동락해온 스승을 은 30에 팝니까? 이것은 30데나리온인데, 당시 이 돈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입니다. 팔아도 헐값에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에 스승을 팔았는데, 향유를 부은 여인은 은 300을 주님 몸에 붓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사랑한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div>
<!-- paragraph:p0015 -->
<div><br>
</div>

<!-- paragraph:p0016 -->
<div>
그는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제자라 하더라도 죄 안 짓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성자도 죄를 짓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회개가 필수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주님은 다 용서해 주십니다. 세상 법정은 감형은 해 줄지 몰라도 죄를 묻지만, 주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회개를 통해 죄를 청산하고 얼마든지 새 출발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죄의 복이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에게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이게 그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사실 배신으로 말하면 베드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베드로도 3번이나 주님을 배신하는데,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까지 거짓되게 살았습니다. 유다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했고, ‘지금 나와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했음에도 가룟 유다는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멀리서 닭소리가 들려오자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이 생각나 울며 밖에 나가 회개합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만 듣고도 회개하는데, 가룟 유다는 주님의 말을 직접 듣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몸값을 대제사장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그는 마무리를 잘못합니다. 자살한 겁니다. 회개는 반성이나 뉘우침이 아니라 삶의 역전입니다. 후회하고 가슴만 칠 게 아닐 과감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심정적 후회, 반성은 회개가 아닙니다. 뉘우쳤다면 즉각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여전히 돼지우리에 앉아 반성해 봤자 의미는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로 마감합니다. 이쯤 되면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한 인생입니다. 단테 &lt;신곡&gt;의 지옥편을 보면 제일 아래층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뜨거운 곳입니다.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3년간 모시고 살았던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지옥 밑창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 인류사의 가장 밑바닥을 산 사람이 된 사실은 놀랍습니다. 가룟 유다의 슬픈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div>
<!-- paragraph:p0017 -->
<div>2010년 3월 21일 주일낮예배/사순절 다섯째 주일</div>
<!-- paragraph:p0018 -->
<div>본문: 마 26:14-25</div>
<!-- paragraph:p0019 -->
<div>제목: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div>
<!-- paragraph:p0020 -->
<div><br>
</div>

<!-- paragraph:p0021 -->
<div>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div>
<!-- paragraph:p0022 -->
<div><br>
</div>

<!-- paragraph:p0023 -->
<div>
<br></div>
<!-- paragraph:p0024 -->
<div>우리가 흔히 갖는 의문 가운데 하나가 주님은 과연 유다가 결국 자기를 배신할 줄 아셨을 텐데 왜 그를 제자로 삼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스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악역을 맡은 두 사람, 곧 가룟 유다와 빌라도에 대해 전향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들이 악역을 담당해 줬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성사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두 사람은 주님의 구속사역에 진정한 동역자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명예회복, 범 교회적인 복권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억지요 왜곡입니다. 주님의 사역에 가룟 유다의 존재나 빌라도의 역할이 필요했다면, 왜 주님이 본문 24절에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은 가룟 유다나 빌라도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나 빌라도를 두둔하려는 그 어떤 움직임도 비성서적입니다.</div>
<!-- paragraph:p0025 -->
<div><br>
</div>

<!-- paragraph:p0026 -->
<div>
그러면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했다면 좋을 뻔했다는 가룟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에 대해 우리는 잘 모릅니다. 개인 신상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어떤 경로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왜 주님을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했는지도 성경을 통해서는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열두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열혈당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열혈당은 젤롯당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무력 봉기를 통해 외세인 로마를 팔레스틴에서 몰아내고 나라의 주권을 찾겠다는 극우 민족주의 집단입니다. 지금 팔레스틴 저항 조직인 하마스나 이슬람의 알카에다 또는 헤즈볼라 같은 게릴라 단체가 바로 열혈당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와 가나안인 시몬 같은 제자가 바로 그 열혈당 출신입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야심과 기대를 갖고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대다수 유대인들도 메시아가 오면 정치적으로 유대를 독립시킬 것이라는 바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제자들은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왕이 되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싸웠습니다. 심지어 요한과 야고보는 어머니를 동원해 청탁까지 합니다. 결국 그들은 끝까지 주님을 정치 군사적 메시아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보니 주님은 거사를 하실 생각은 안 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2절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1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자꾸 죽는다는 말씀만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가룟 유다는 좌절감과 배신감을 느낍니다. 한 마디로 속았다는 겁니다. 가짜 메시아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지체 없이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줄 터이니 얼마를 주겠냐고 합니다. 주님에 대한 깊은 실망과 좌절을 배신으로 보복한 겁니다. 그래 그렇지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3년간이나 따라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제자가 돈을 받고 스승을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가룟 유다의 인간성을 의심합니다. </div>
<!-- paragraph:p0027 -->
<div><br>
</div>

<!-- paragraph:p0028 -->
<div>
그는 양심이 지극히 불량했습니다. 본문 20절 이하도 최후만찬 장면인데, 주님이 제자를 둘러보시며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자, 제자들이 놀라 근심스러워 ‘주여, 내니이까?’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떡 그릇에 손을 넣으며 딴전을 부립니다. 떡으로 입을 막으며 그 순간을 피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그 속셈을 아시고 ‘지금 나와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 나를 판다’고 합니다. 그러자 시침을 떼고 다른 제자들처럼 묻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단한 강심장입니다. 개역성경보다 이번 개정판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랍비여, 설마 저는 아니지요?’ 이때는 이미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가 주님의 몸값을 흥정하고 은 30을 받았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은 30을 만지작거리며 ‘주님, 나는 아니지요?’라고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철면피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의 양심도 거듭나야 하는데, 3년간이나 주님을 따라 다닌다 하면서도 여전히 불량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주님을 팔고 맙니다. 어떻게든 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망가진 인격을 복원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도 실패했습니다. </div>
<!-- paragraph:p0029 -->
<div><br>
</div>

<!-- paragraph:p0030 -->
<div>
뿐만 아니라 그는 돈을 너무 밝혔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을 보면, 가룟 유다를 아예 도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 회계를 맡았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공금을 횡령했습니다. 그래서 도적이라고 한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 이하를 보면 한 여인이 주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흥분해서 그 여인을 책망합니다. 왜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이 장면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 향유를 왜 300데나리온에 팔아 다른 이들에게 주지 않느냐는 겁니다. 가룟 유다의 말입니다. 얼마나 계산이 빠릅니까. 척 한 번 보면 300데나리온이라는 감정가가 나옵니다. 그리고 얼마나 이성적입니까. 예수님 머리에 붓는 것보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훨씬 더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일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라 평소에 공금을 유용한 도적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치밀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세리도 있었습니다. 마태가 바로 세리 출신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회계 업무를 맡지 않고 가룟 유다가 맡습니다. 그만큼 그는 신뢰를 얻은 듯합니다. 제자들 가운데도 가룟 유다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깜쪽 같이 남몰래 공금을 횡령한 사람이 가룟 유다였습니다. 목사가 목회하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참는 것은 봉급 때문입니다. 스님이나 신부들은 독신이기에 그나마 괜찮지만, 목사는 가정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기에 돈에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에 집착하면 목회자는 끝장입니다. 평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가룟 유다 보십시오. 어떻게 3년간이나 동고동락해온 스승을 은 30에 팝니까? 이것은 30데나리온인데, 당시 이 돈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입니다. 팔아도 헐값에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에 스승을 팔았는데, 향유를 부은 여인은 은 300을 주님 몸에 붓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사랑한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div>
<!-- paragraph:p0031 -->
<div><br>
</div>

<!-- paragraph:p0032 -->
<div>
그는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제자라 하더라도 죄 안 짓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성자도 죄를 짓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회개가 필수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주님은 다 용서해 주십니다. 세상 법정은 감형은 해 줄지 몰라도 죄를 묻지만, 주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회개를 통해 죄를 청산하고 얼마든지 새 출발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죄의 복이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에게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이게 그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사실 배신으로 말하면 베드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베드로도 3번이나 주님을 배신하는데,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까지 거짓되게 살았습니다. 유다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했고, ‘지금 나와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했음에도 가룟 유다는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멀리서 닭소리가 들려오자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이 생각나 울며 밖에 나가 회개합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만 듣고도 회개하는데, 가룟 유다는 주님의 말을 직접 듣고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몸값을 대제사장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그는 마무리를 잘못합니다. 자살한 겁니다. 회개는 반성이나 뉘우침이 아니라 삶의 역전입니다. 후회하고 가슴만 칠 게 아닐 과감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심정적 후회, 반성은 회개가 아닙니다. 뉘우쳤다면 즉각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여전히 돼지우리에 앉아 반성해 봤자 의미는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로 마감합니다. 이쯤 되면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한 인생입니다. 단테 &lt;신곡&gt;의 지옥편을 보면 제일 아래층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뜨거운 곳입니다.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3년간 모시고 살았던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지옥 밑창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 인류사의 가장 밑바닥을 산 사람이 된 사실은 놀랍습니다. 가룟 유다의 슬픈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div>
<!-- paragraph:p0033 -->
<div><br>
</div>

<!-- paragraph:p0034 -->
<div>
<!-- paragraph:p0035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br>
</div>

<!-- paragraph:p0036 -->
<div>
<br></div>

<div class="archive-resource-links"><a href="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vWV0mjClzNM%24" title="원문 미디어 링크 (이용 상태 미확인)"></a></di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