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00314m: 사랑하시는 제자(요 19:25-27)

2010년 3월 14일 주일낮예배/사순절넷째주일
본문: 요 19:25-27
제목: 사랑하시는 제자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태에서 자기 모친 마리아를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부탁하는 대목입니다. 26절 이하를 다시 봅니다.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 나오는 사랑하시는 제자는 누구입니까? 다른 제자는 다 달아났는데 끝까지 남아 있다가 마리아까지 모시게 된 이 제자는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대목으로 갑니다. 21절 이하입니다.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3절을 보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도 아예 눕듯이 주님 품에 안겨있습니다. 2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제자라는 베드로마저도 그를 통해서 누가 주님을 팔려느냐며 묻고 있습니다. 대체 어떤 제자이기에 주님 품에 안겨있고,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켰으며, 익명의 호칭을 쓰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면서 자기 이름 대신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의 이름만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 또는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나옵니다. 익명처리를 한 겁니다. 왜냐면 자기 이름보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게 더 적절하고 더욱 고백적인 호칭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요한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남이 붙여준 이와 비슷한 칭호도 갖고 있는데, 바로 사랑의 사도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그만큼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규정한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4장 8, 16절에서 두 번이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말년에 소아시아 에베소 교회를 담임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사랑만 설교했습니다. 네로 황제 때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합니다. 거기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에베소로 돌아왔는데, 거동이 불편해 제자들이 강단에 앉혀 놓으면 오직 한 가지만 설교했습니다.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이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노(老) 사도의 꺼져가는 외마디 설교에 온 교회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서양 사람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좋아합니다. 영어로 존(John)입니다. 독일어로는 요한네스(Johannes)입니다. 불란서도 장(Jean)이 요한이란 이름입니다. 스페인어로는 후안(Juan)입니다. 러시아말로는 이반(Ivan)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요즘은 김 요한, 이 요한이라고들 이름을 짓습니다만, 옛날에는 개에게 많이 지었습니다. 개를 도꾸(dog)라고 불렀듯이 쫑이 바로 요한이란 뜻입니다. 어째서 요한이 세계인이 좋아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먼저 그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고백은 숨김없는 그의 간증입니다. 최후의 만찬석상만 보더라도 젖먹이 아이가 품에 누운 모습입니다. 그가 쓴 요한일서 4장 10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은 본래 호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주님이 제자들과 사마리아를 통과하는데 그들이 주님 일행을 방해했습니다. 그때 요한이 당장에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것들을 다 쓸어버리자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주님이 요한과 야고보 형제에게 붙여주신 별명이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입니다. 이토록 과격했던 사람이 요한입니다. 사랑은 먼저 많이 받아야 남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많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식도 남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찬송가 58장도 주님의 넓은 사랑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안다고 했습니다. 요즘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사건의 피의자 김길태가 붙잡혀서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사고 밤낮으로 그의 이름이 매스컴에 오르내립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김길태도 불쌍합니다. 두 살 때 길에 버려졌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키웠습니다. 어쨌든 자기 친부모에게 양육을 받으며 크는 것만큼 사랑을 받지 못한 겁니다. 애정결핍인 겁니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어릴 때 자기 부모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던 들 저런 범죄자가 되었겠습니까? 애정결핍, 사랑의 결핍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저토록 황폐하게 한 겁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두 살 먹은 갓난아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여러분 부디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십시오. 먼저 사랑을 듬뿍 받으십시오. 하늘의 별과 달은 먼저 햇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 요한처럼 사랑의 사도, 사랑의 전도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음으로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해 늘 채무자 의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6절을 보면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합니다. 주님이 체포된 직후의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다 겁이나서 줄행랑친 겁니다. 물론 요한도 이때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아래에 있습니다.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주님의 최후를 지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제자들과 도망쳤던 요한이 가슴을 치며 돌아온 겁니다. 왜요? 그동안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도 컸기에 차마 그 사랑을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을 보니 예수님의 모친 외에 막달라 마리아도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예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여인입니다. 간음하다 잡혀와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주님이 살려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의 임종을 지키고, 안식  후 첫날 새벽 주님의 무덤에 갔다가 주님을 뵙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남다른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주님의 사랑에 대한 채무의식으로 그렇게 주님 곁을 떠나지 못한 겁니다. 바울도 어거스틴, 프랜시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받았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그 사랑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살았기에 그들은 모두 사랑의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큰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값을 주님이 당신의 피를 바쳐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당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따라서 한시도 주님의 사랑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정말 요한처럼 사랑의 빚진 자가 되어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겠다는 심정으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옳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요한도 이런 마음으로 살았기에 사랑의 사도가 된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자기도 열심히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27절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은 주님이 당신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신 때부터 평생을 자기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후에 에베소에 가서 목회할 때도 거기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에베소에서 묻혔습니다. 요한도 거기에 묻혔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가면 요한과 마리아의 유적지가 많습니다. 마지막까지 주님과의 신의를 지키며 요한이 마리아를 모신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이 사랑하신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을 우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사랑한 모든 사람을 우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주님이 사랑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확인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랑하시지만 저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 정서로는 안 맞지만 그래도 내가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이니 용납해 보겠습니다고 해야 합니다. 주님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까? 죄인들, 사회적 약자들, 고아들, 과부들, 창녀들입니다. 우리는 부자들, 교양 있는 사람을 사랑해도 사회적 약자들은 사랑하지 못합니다. 피해서 달아날 뿐입니다. 주님은 권력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죄하고 무시한 과부들, 고아들, 환자들, 죄인들을 찾아갔고, 헌신했으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 얼마나 명쾌한 정답입니까. 요한처럼 우리도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에베소까지 모시고 가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우리도 사랑합시다. 우리 모두가 요한처럼 이 시대의 사랑의 사도, 전도사가 되십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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