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14n: 나귀와 다락방(마 21:1-9; 막 14:12-16) 남선교회 헌신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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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4일 주일오후예배/남선교회 헌신예배
본문: 마 21:1-9; 막 14:12-16
제목: 나귀와 다락방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나귀와 다락방은 십자가를 앞둔 주님께 바친 최후의 헌상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심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귀와 다락방을 헌상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나귀 주인이, 마가복음에는 주님께 최후의 만찬장을 제공한 다락방 주인이 나옵니다. 주님은 말기로 갈수록 외로우셨습니다. 더구나 최후의 한 주간은 더욱 그랬습니다. 모두 배신했고, 음모했고, 비겁했지 누구 하나 주님을 돕거나 구명하기 위해 애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 사람은 주님 마지막 길에 희생을 아끼지 않은 헌신자들이었습니다. 남선교회 헌신예배를 맞아 이들의 아름다운 헌상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자 합니다.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주님의 최후 여정에 요긴하고 아름다운 희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 이 두 사람은 이름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그들의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만, 적어도 성경은 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무명임에도 그들이 봉사한 내용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나귀를 바친 사례를 보면 이 사건은 이미 구약시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사건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서 이미 예언한 사건이 성취되는 구속사적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1장 4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면서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합니다. 이미 5백 년 전에 예언된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구속사적 사건을 도운 희생임에도 정작 나귀를 바친 주인은 완전히 숨습니다. 다락방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식사 한 끼를 도운 사람입니다. 이 식사에서 주님은 오늘까지 이어오는 성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다락방 주인 역시 아름다운 봉사와 헌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내거나 생색을 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이든 마가복음이든 오직 나귀를 타신 주님만 보이지 어디에도 나귀 주인이나 다락방 주인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게 진짜 헌신자들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만 드러내야 합니다. 자기는 십자가 뒤에 숨고 주님의 이름만 높여야 합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명분이 있는 사역이고, 수백 년 전에 예언한 구속사적 사건이라 해도 나는 숨고 주님만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저마다 자기 얼굴과 이름을 선전하기 바빠서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도 나귀 주인과 다락방 주인처럼 무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헌신자들의 기본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 당신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사람은 다 흠 없고 티 없는 것, 준비하고 예비한 것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절을 보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탄 적이 없는 순수하고 깨끗하고 흠 없고 티 없는 나귀를 바쳤습니다. 주님께 바치는 것은 이래야 합니다. 언제나 아무도 타보지 않은 순수한 나귀 새끼를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첫 새끼, 첫 수확, 첫 소득, 첫 열매를 구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헌신과 헌상의 중요한 원칙입니다. 옛날에는 제사장들이 하는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가 흠 없는 제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온전한 제물이어야 제물 적합 판정을 내리고 그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나귀 주인은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다락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된 방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라고 하신 것을 볼 때, 그 객실은 준비된 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주님의 최후 만찬장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급조된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께 아무 객실이나 불쑥 드리면 안 됩니다. 그것은 헌상의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차이가 무엇이냐면, 피의 제사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니라, 아벨은 첫 새끼를 드렸고 가인은 먹던 곡식을 바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바치시고, 사전에 준비된 객실을 드리십시오. 선데이 베스트(sunday best)를 강조한 이유는 항상 예비된 것을 드린다는 자세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상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비되고 특별한 것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준비된 것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때그때 떼우고 있습니다.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두 사람은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자 아무런 갈등 없이 기꺼이 내 놓았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절입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나귀 주인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14장 15절도 보면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식이 쓰겠다고 하면 기꺼이 내놓지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는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평소에 하시던 대로 주님이 이번에도 예루살렘에 걸어서 가겠다고 하면 문제가 없는데, 평소와는 달리 나귀를 타고 가겠다고 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시험에 들고, 갈등하고 상처받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귀 주인, 다락방 주인 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당신의 동역자로 쓰십니다.
우리가 왜 주님께 나귀든 다락방이든 인색하면 안 됩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다락방과 나귀를 요구하시기 전에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저함 없이 내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비참하고 참혹한 십자가 형틀을 지며 우리를 대신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나귀와 다락방을 내주지 않으려고 미적댈 수 있습니까?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 나귀를 찾으시고, 마지막 식사를 위해 다락방을 찾으시는 주님의 요구에 우리는 결단하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여기 나귀가 있습니다, 여기 다락방이 있으니 준비된 이 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들라고 해야겠습니다. 지금은 고난기간인 사순절입니다. 우리도 그 옛날 나귀와 다락방 주인처럼 보다 희생적으로, 헌신적으로 주님께 우리 가진 것을 아낌 없이 드립시다. 남선교회 회원들은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 헌신을 다짐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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