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00307m: 소금과 빛(마 5:13-16) 사순절 셋째주일/사회봉사주일

2010년 3월 7일 주일낮예배/사순절 셋째주일/사회봉사주일
본문: 마 5:13-16
제목: 소금과 빛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요즘은 아파트가 많아서 마당에 소금 뿌릴 일이 없습니다. 무속에서 부정을 물리치거나 악귀를 쫓을 때 소금을 뿌렸습니다. 성경도 보면 구약 시대 성전에는 제단 곁에 정결을 상징하는 소금을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약을 맺을 때 소금을 두고 맹세합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금은 인류가 사용해온 유수한 조미료요 방부제였습니다. 특히 팔레스틴은 더운 나라여서 더욱 소금이 절실하고 중요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는 잘쯔부르크가 있습니다. 요즘은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지만, 중세 때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서부 유럽의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양질의 소금이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 이름이 소금의 성(Salzburg)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소금 폐광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천일염이지만 유럽 쪽은 암염입니다. 요즘은 냉장고도 다른 조미료도 다양해서 소금이 그토록 소중하지는 않지만, 중세 때는 소금이 방부제 역할을 했고 조미료 역할을 다 했습니다. 잘쯔부르크는 도시가 크지는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중세 때 돈이 많아서 잘 꾸몄기 때문입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요했고, 맛을 낼 때도 필요했습니다.

이런 소금을 두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소중한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요즘은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과 주님 시대와는 그 느낌이 다를 겁니다. 주님 당시에는 소금이 더욱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도 빛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빛이 더욱 절실합니다. 태양신을 섬기지 않는 종족은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출 보려고 하고, 보름달 보려고 합니다. 원시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빛이 소중한 나머지 빛을 숭배한 겁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의 가옥 구조는 단칸방에 작은 창이 하나 있거나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대낮에 들어가도 집안이 컴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감람유를 등잔 기름으로 사용했는데, 이게 식용유입니다. 그래서 집을 밝히려면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주님이 우리더러 그냥 소금이라 빛이라 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세상은 부패한다는 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어두워지고 썩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건지기 위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소금과 빛을 둔다는 겁니다. 세상이 부패하지 않으면 소금이 필요 없고, 어둡지 않다면 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두신 겁니다.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 사회 책임을 밝히신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어두운 세상을 탓하거나,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하고, 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과 소임을 방기하기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더 부패하는 겁니다. 한 사회가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전적으로 빛과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달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잘 못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 역할을 하면 그 사회가 썩을 리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세상은 점점 더 어둡고 썩어가는데 의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하자, 아브라함이 말리고 나섭니다. 의인을 찾아보겠다는 겁니다. 50명부터 시작해서 에누리를 해나가다 마지막 10명까지 내려옵니다. 그러나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악인이나 죄인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부패하고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두신 겁니다. 믿는 자들이 제대로 해야 세상이 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오가는 사람에게 밟힌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의 모양에 딱 맞는 말입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라 하고, 목사를 먹사라 하고, 집사를 잡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탓합니다. 우리가 이런 굴욕과 모욕은 당해도 쌉니다. 세상 사람들 욕할 것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탓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맛을 잃으면 이렇게 된다고 주님이 경고하셨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소금은 어떻게 해야 짠맛을 내고, 등불은 어떻게 해야 등경 위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소금이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자신을 해체해야 합니다. 자신을 녹여야 합니다. 등불도 자신을 산화해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연소도지 않고 어둠을 밝힐 길은 없습니다. 심지어 태양도 자기를 태워가며 빛을 발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을 소모하면서 빛을 내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도 썩어야 30배든 60배든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자신을 녹이고 태우는 만큼 세상의 부패를 막고,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희생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세상 사람들과 같은 풍습으로 살아갑니다. 요즘은 주일 예배드릴 때만 신자 행세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희생하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자신을 녹이기 싫고, 자신을 태우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본연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다들 왜 큰 교회로 몰려갑니까. 거기 가면 희생을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굳이 자신을 녹이고 태우지 않고 적당히 섞여서 우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익명의 신자를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며,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했는데, 현대 교회는 이런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원래 등불이 꺼지면 매운 연기만 납니다. 바닷물에는 불과 3%의 염분이 바다를 지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20%가 넘는데도 이렇게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다. 다 짠맛을 잃은 겁니다. 그리스도인 본연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합시다. 자기를 해체해야만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신 우리의 동질성, 정체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회개하고 결단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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