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21m: 스티그마(갈 6: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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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1일 주일낮예배/사순절 첫째 주일
본문: 갈 6:15-17
제목: 스티그마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7절 하반절을 보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합니다. 여기서 흔적이란 말이 헬라말로 ‘스티그마’입니다. 원래 이 말은 쇠 인장을 불에 달구어 말이나 소의 엉덩이에 찍는 화인을 뜻합니다. 고대 희랍이나 로마 문화권에서는 짐승만이 아니라 포로나 노예에게도 이런 화인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수도사들 가운데는 바울의 이 말을 실제로 이해해서 바울이 예수 라고 새긴 인장을 몸 어딘가에 찍었을 것이라고 해서 많이들 따라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흔적은 이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의미로 이 말을 했을까요?
스티그마는 소유를 나타내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스티그마를 찍는 것은 소유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사들이 하나님의 인을 갖고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이마에 스티그마를 찍는데, 그 수가 144000입니다. 그래서 박태선의 전도관에서는 이걸 갖고서 많이 오도했습니다. 144000이 차기 전에 빨리 신앙촌에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안상홍 같은 사람도 여전히 같은 이야기로 속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짐승의 스티그마인 666이 나옵니다. 마귀가 찍는 스티그마인데, 이 666이 이마에 찍히면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이마에 777이 있던가, 아니면 666입니다. 777은 하나님의 스티그마입니다. 777은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마귀의 수는 666입니다. 사탄, 마귀, 적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도 삼위일체이고, 마귀도 삼위일체입니다. 마귀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이마에 666을 찍고, 하나님의 사자들은 열심히 777을 찍습니다. 우리는 안 보이지만, 하나님 눈에는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스티그마는 그가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결정합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가가 글씨를 쓰고 낙관을 찍는데, 이것을 보고 우리는 그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압니다. 따라서 바울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자신이 주님께 속한 주님의 종이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몸에는 누구의 스티그마가 있습니까?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우리 몸에도 예수의 흔적, 하나님의 스티그마가 있습니다. 우리 이마에는 분명히 777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 주님께 속한 주님의 소유이고,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고 바울처럼 담대하게 고백하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이마에 하나님의 스티그마가 있노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스티그마는 주님을 위해 당한 고난의 흔적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은 곧 십자가의 흔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성 프랜시스의 전기를 보면, 어느 날 프랜시스가 높은 산에 올라가 여러 날 고행을 합니다.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온 몸에 엄청난 고통이 오고, 이어서 양손과 양발에 성흔(聖痕)이 생겼습니다.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에서 이것을 중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의 흔적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프랜시스는 이 고난의 신비체험 이후 더욱 신앙이 깊어지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이하를 보면 최후 심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런데 주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들은 누구도 영광만 누렸지, 자기 십자가를 진 흔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법이고 떠나가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없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다 해도 다 불법입니다. 그들에게는 고난의 흔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반면에 바울 같은 사람은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그의 고백을 보면, 수도 없이 맞고, 돌팔매질 당하고, 배를 타고 가다 파선도 당하고, 이방인과 동족, 강도에게 온갖 박해와 위협을 겪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몸이 성한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주님을 위해 당한 이런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실적을 내도 고난의 흔적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불법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왜 나를 모르냐며 주님께 대들지 마시고, 늘 고난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지니고 사십시오.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의 뒤를 좇으십시오. 스필버그 감독의 출세작인 <죠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식인 상어 죠스를 잡기 위해 선장, 해양학자, 해양 경비대장 이 세 사람이 바다로 나갑니다. 바다에서 무료하니까 술을 마시며 옛날 무용담을 자랑하다가, 마침내는 상어에게 입은 상처를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해안 경비대장은 상처가 없어 쩔쩔맵니다. 훗날 우리도 같은 꼴을 보입니다. 내 몸에 없는 예수의 흔적을 찾느라 땀을 흘릴 겁니다. 편하게 예수를 믿는 것만 능사가 아닙니다. 고난을 요리조리 피하며 사는 게 행운만이 아닙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면 천신만고를 겪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모든 상처를 주님 앞에 가지고 가겠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웠다는 물증이 바로 스티그마이기 때문입니다. 이 흔적이 마지막 날에는 훈장이 됩니다. 예수의 흔적이 훈장입니다. 그래야 부끄럽지 않게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기간인 사순절 기간에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씀을 깊이 사색하며, 주님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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