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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2008년 3월 5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후서 강해 2<br>본문: 고후 1:12-24</p>
<!-- paragraph:p0002 -->
<p>[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p>
<!-- paragraph:p0003 -->
<p>지난 주에는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많은 고난을 당했다는 바울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8절을 보면 힘에 지나도록 고난을 당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9절에서는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만큼 극심한 환난과 고난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당한 극단한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주님의 배려였다는 겁니다. </p>
<!-- paragraph:p0004 -->
<p>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기도를 부탁합니다. 어떻게 기도함으로 자기를 도우라고 합니까? 앞으로도 살 소망까지 끊어질 만큼의 극심한 고통과 고난이 올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잘 감당하며 감수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복음전도에 자신을 던진 위대한 사도입니다. 이런 사람도 힘에 부칠 만큼의 고생을 하고, 살 소망도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될 만큼의 고난을 겪었다는 겁니다. </p>
<!-- paragraph:p0005 -->
<p>우리는 연약해서 고난이 오면 죽고 싶기도 합니다. 극심한 고난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오늘 우리와 바울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대목에서 우리와 바울이 다르냐면 이런 고난을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며 감당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불행으로 여깁니다. 고난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내 행복을 시기하는 하나님의 심술쯤으로 고난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나옵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 찬송할 수 없습니다. 내가 겪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불행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환난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이제 여기서 이렇게 죽는가보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런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요 계시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매달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 더 믿음을 키웠고, 더 주님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과 우리는 너무도 다릅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주신 것인데 우리는 그 환난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이 유감입니다. 고난에 대한 이해와 해석과 고난을 대처하는 방식에서 우리와 바울은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으로, 음성으로 듣고 앞으로도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고린도교회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p>
<!-- paragraph:p0006 -->
<p>그리스도께서 내게 고난을 주시면 주시는 만큼 그리스도의 위로와 격려도 내게 넘친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울의 과장이 아닙니다. 4절을 보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자기와 같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겁니다. 바울은 자기의 고난을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p>
<!-- paragraph:p0007 -->
<p>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고전 16:7). 그러나 고의적으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두고 고린도교회에 말이 많았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사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은 왜 자기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는지를 해명합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어떤 일을 행하든지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양심이 증거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바울의 변덕때문도 아니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싫어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과 그들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3절). </p>
<!-- paragraph:p0008 -->
<p>고린도교회 방문을 취소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무슨 상관이 있고, 어떻게 이 일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아낀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로 인해 상심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쓸 때의 심경은 고린도후서 2장 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애통하면서 눈물로 고린도전서를 썼다는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 편지를 써나가다 편지를 갈무리하며 고린도전서 16장에서 곧 방문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지 않은 것입니다. 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안 갔느냐면, 자기의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방문하면 교회기강을 잡으려고 가차없이 치리할 터인데, 한 발 물러서서 이것이 교회에 덕이 되고 하나님께 유익이 되겠는가를 생각했다는 겁니다. 본래 고린도교회를 가려고 했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니 이것은 주님의 뜻보다는 육체의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문계획을 유보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너희를 아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0장 8절입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권세는 파하려는 게 아니라 너희를 세우려고 사도의 직임을 주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 걸음에 달려가서 못되게 구는 교인들을 징계하려고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울의 목회사역에서 대전제였습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몫이고, 무너진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자신의 직임이라는 겁니다. 만약 고린도전서에서 쓴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다는 교회가 파탄이 났을 겁니다. 이것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p>
<!-- paragraph:p0009 -->
<p>교회에서는 옳고 그름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에는 덕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소임은 세우는데 있습니다. 굳이 파해야 할 것은 주님께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심판의 소임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판단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편견과 주관이 개입해서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다수결이라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판단, 심판, 징계는 우리의 소임이 아니라 주님의 몫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우는 일에 봉사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골자가 바로 이것입니다. 늘 우리도 바울을 닮아야 합니다. 육체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해도 단호히 변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 세운 계획이라고 잘못된 줄 알면서도 무리하게 시행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우리는 비겁해서 이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고 계획했지만, 그 일이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사도권까지 도마에 올랐지만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교회에 덕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를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처신해야 옳습니다.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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