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00207m: 몸(고전 6:12-20)

2010년 2월 7일 주일낮예배
본문: 고전 6:12-20
제목: 몸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제가 소개한 15절 하반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 안에 창녀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나서 집으로 가면서 창녀를 찾아간 겁니다. 5장 1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고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패륜적인 일이 일어난 겁니다. 아마도 새 엄마를 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겁니다.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고린도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고대 도시입니다. 지금도 현대적인 도시입니다.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70-80km 떨어진 곳인데, 바울 시대 때는 헬레니즘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린도에는 미의 여신인 비너스의 신전 곧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코린트 양식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거기에는 수백 명의 미녀 사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다 창녀였습니다. 거기에 바쳐지는 제물도 다 소화가 안 되어 시장으로 고기가 시장으로 나와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도 나온 겁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일찍부터 그런 문화에 젖어 있었기에 아무도 그런 부분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조차도 양심의 가책 없이 그런 생활을 계속 해 온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헬레니즘은 영과 육으로 구분합니다. 이원론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예배하고, 세상살이는 육으로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서는 자기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돌아갈 때는 창녀를 만나 육체로 쾌락을 즐기는 겁니다. 이게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희랍 사람들은 물질세계를 어둠으로, 그림자로 보았기에 육체는 어떻게 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에 문제를 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삶을 즐기는 게 가장 실속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신 곧 영혼입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이데아의 세계, 로고스의 세계가 중요합니다. 그들의 구원은 영혼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기꺼이 마신 것은 여기에도 희랍적인 이원론적 사상이 전제된 것입니다.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자유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 육신은 악하고 거짓이며 어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영혼으로 하는 겁니다. 이게 소위 희랍 사람들의 전형적인 이원론입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의 신앙행태에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16절을 보면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창녀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바울이 얘기하는 “몸”은 어떤 겁니까? 오늘 본문에는 몸이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13, 15, 16, 18, 19, 20). 여기서 말하는 몸은 육체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육체(살)은 사르크스(sarx)입니다. 몸은 소마(soma)입니다. 영혼은 프쉬케(psyche)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프뉴마(pneuma)입니다. 몸은 육체와 영혼을 다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우리의 전부를 뜻합니다. 전인(全人)입니다. 육체와 정신을 다 아우르는 일원론적 개념입니다. 사람은 영으로 예배하고 육체로 창녀를 만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몸으로 예배하고, 몸으로 창녀를 만납니다. 왜냐면 사람은 몸(소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헬레니즘의 이원론과 대비되는 헤브라이즘의 일원론적 인간 개념입니다. 사람은 전인입니다. 영혼따로 육체따로가 아닙니다. 사람은 몸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사람은 머리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사랑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분열증입니다. 몸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사랑하고,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헬라사람들은 짧은 세상을 육체로는 쾌락을 즐기며 사는 게 실속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바로 쾌락주의 행복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은 거짓이라고 합니다. 전인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희랍적인 사고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교회 모습 다르고 사회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이원론적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사회에서는 육적으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런 생활이 틀렸다고 하는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분열증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일원론적 인간 이해, 통전적 인간 이해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사십시다. 다가오는 주일이 설인데, 제사상 차려 놓고 제 마음은 아닙니다. 제 육체만 절하지 제 영혼은 아닙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도 전인으로, 우상을 만나도 전인으로 만납니다. 성경은 이혼을 금합니다. 그런데 이혼을 허용하는 경우는 간음했을 때입니다. 성경은 간음을 단순한 육체적 만남으로 보지 않습니다. 간음한 사람은 어쩌다 실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성경은 전인으로 창녀를 만나 한 몸이 되듯이 간음을 그렇게 봅니다. 상대와 전인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음을 심각하게 보는 겁니다. 나는 내 영혼을 판 적이 없다. 나는 잠시 내 육체만 내 줬을뿐이다는 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자기 합리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 앞에 절을 하면 전인으로 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서나 몸을 강조합니다. 13절도 보면,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영으로 예배하고, 세상에서는 육으로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고린도인입니다. 몸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20절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주님은 내 전인을 값으로 사신 겁니다. 주님은 내 살과 영혼을 다 속량하신 겁니다. 로마서 6장 13절입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번 설에도 여러분의 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산 제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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