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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m: 희망의 이름으로(요 8:1-11)

2010년 1월 17일 주일낮예배/여전도회 주일
본문: 요 8:1-11
제목: 희망의 이름으로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6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렇게 수작했다고 합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습니다. 돌을 던지거나 던지지 말거나. 이렇게 답해도 걸리고 저렇게 답해도 걸립니다. 돌을 던지라 하면 날마다 사랑을 선포하는 자가 사람 죽인다고 할 것이고, 던지지 말라하면 율법을 범한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난감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주님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시고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주님이 글씨를 썼다는 대목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십계명을 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와 간음한 남자의 명단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엇을 썼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왜 주님이 땅에다 글을 쓰셨습니까? 주님은 흥분한 무리를 향해 비수 같은 한 말씀을 던지기 위해 긴장을 조장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본문에도 ‘사람들이 묻기를 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드디어 주님이 입을 떼셨습니다. 기절초풍할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입만 열면 어느 쪽이든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는데, 돌로 치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겁니다.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따라서 9절을 보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합니다. 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냥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표현이 어른으로부터 젊은이들이라고 합니다. 어른이 죄를 더 지은 모양입니다.

주님과 간음한 여인만 남습니다. 주님이 ‘너를 정죄하던 자가 어디에 있냐?’고 합니다. ‘없다’고 하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똑 같은 상황을 무리들은 돌로 치는 게 옳다고 보았고, 예수님은 용서하는 게 옳다고 보았습니까? 처벌과 용서는 어떻게 나눠지고 있습니까?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돌을 던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주님은 비록 지금은 죄인이나 앞으로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보셨을까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내일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날이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내일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고정된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은 간음죄를 범했을지라도 내일은 순결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주님의 시각과 무리의 관점이 이 점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죄를 범했기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주님은 비록 죄인이지만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앞으로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너는 너를 정죄하는 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무리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고정된 눈으로 봄으로써 죽여서 보았지만, 주님은 그녀를 내일이 있는 존재로 보심으로써 산 자를 살아있는 자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보시는 눈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과거의 전력으로 평가하지 않고, 미래의 빛 앞에서 그 사람을 조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철저히 그 사람의 이력서 즉 과거를 놓고 따집니다. 지난 이력, 과거사를 잣대로 평가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과거가 그 사람의 현재를 심판하고 판단하는 근거와 척도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것은 부당하다고 하십니다. 어제 그렇게 살았더라도 오늘이나 내일은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는 것, 이점을 인정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평가하라는 겁니다. 사람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언제나 미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1절 이하를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이 길을 가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조상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늘 이렇습니다. 과거로써 현재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려고 합니다.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이나, 부모, 본인의 죄 때문이라는 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다 과거지사가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3절을 보니,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지사를 부정하시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소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주님의 이런 해석을 보십시오. 차원이 다릅니다.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라고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배격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전혀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소경을 보시면서도 절대 포기하거나 절망하시지 않고 희망적인 전망과 해석을 내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주님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며 용서해서 돌려보낸 본문의 여인의 이후 삶은 어떠했습니까? 어거스틴은 그녀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보았습니다. 이 전통 때문에 성화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많이 나옵니다. 중세 그림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검은 머리카락에, 가슴을 강조해서 그렸습니다. 외경 중에 마리아 복음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는데 나중에 성녀(聖女)가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서에서도 주님 가까이에서 사역을 돕고, 제자들을 뒷바라지하는 헌신적인 여인으로 나옵니다. 마가복음 15장 40절 이하를 보면 주님의 임종을 지킨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고, 주님을 장례한 무덤을 확인한 여인도 그녀였고, 주님의 빈무덤을 발견하고 한 없이 울었던 여인도,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여인도,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었다면, 성녀가 된 그녀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고정관념이 있었다면 주님이 낮고 천한 사람을 서스럼 없이 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미래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죄가 이 간음한 여인보다 못할 것 같습니까? 주님이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할 때 다 달아났듯이 우리 가운데도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고 그래서 내일이 있는 희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우리도 주님처럼 사람을 희망적이고 가능성의 존재로 바라보고 삽시다. 과거로 그 사람을 단정하지 말고, 살아있는 존재를 고정된 눈으로 심판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살아있는 존재로 보십시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그 희망에 부응하고, 우리 주위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의 큰 영광을 확인하는 은혜와 복이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2010년 1월 17일 주일낮예배/여전도회 주일
본문: 요 8:1-11
제목: 희망의 이름으로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6절 말씀을 보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그렇게 수작했다고 합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습니다. 돌을 던지거나 던지지 말거나. 이렇게 답해도 걸리고 저렇게 답해도 걸립니다. 돌을 던지라 하면 날마다 사랑을 선포하는 자가 사람 죽인다고 할 것이고, 던지지 말라하면 율법을 범한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난감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주님은 즉각적인 대답을 피하시고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주님이 글씨를 썼다는 대목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십계명을 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와 간음한 남자의 명단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엇을 썼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왜 주님이 땅에다 글을 쓰셨습니까? 주님은 흥분한 무리를 향해 비수 같은 한 말씀을 던지기 위해 긴장을 조장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본문에도 ‘사람들이 묻기를 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드디어 주님이 입을 떼셨습니다. 기절초풍할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입만 열면 어느 쪽이든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는데, 돌로 치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겁니다.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따라서 9절을 보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합니다. 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냥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표현이 어른으로부터 젊은이들이라고 합니다. 어른이 죄를 더 지은 모양입니다.

주님과 간음한 여인만 남습니다. 주님이 ‘너를 정죄하던 자가 어디에 있냐?’고 합니다. ‘없다’고 하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십니다. 똑 같은 상황을 무리들은 돌로 치는 게 옳다고 보았고, 예수님은 용서하는 게 옳다고 보았습니까? 처벌과 용서는 어떻게 나눠지고 있습니까?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돌을 던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주님은 비록 지금은 죄인이나 앞으로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보셨을까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내일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날이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내일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고정된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은 간음죄를 범했을지라도 내일은 순결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주님의 시각과 무리의 관점이 이 점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죄를 범했기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주님은 비록 죄인이지만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앞으로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너는 너를 정죄하는 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무리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고정된 눈으로 봄으로써 죽여서 보았지만, 주님은 그녀를 내일이 있는 존재로 보심으로써 산 자를 살아있는 자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보시는 눈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과거의 전력으로 평가하지 않고, 미래의 빛 앞에서 그 사람을 조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철저히 그 사람의 이력서 즉 과거를 놓고 따집니다. 지난 이력, 과거사를 잣대로 평가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과거가 그 사람의 현재를 심판하고 판단하는 근거와 척도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것은 부당하다고 하십니다. 어제 그렇게 살았더라도 오늘이나 내일은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는 것, 이점을 인정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평가하라는 겁니다. 사람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언제나 미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1절 이하를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이 길을 가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조상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늘 이렇습니다. 과거로써 현재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려고 합니다.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이나, 부모, 본인의 죄 때문이라는 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다 과거지사가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3절을 보니,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지사를 부정하시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소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경이 되었다는 겁니다. 주님의 이런 해석을 보십시오. 차원이 다릅니다. 과거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라고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배격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전혀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소경을 보시면서도 절대 포기하거나 절망하시지 않고 희망적인 전망과 해석을 내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주님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며 용서해서 돌려보낸 본문의 여인의 이후 삶은 어떠했습니까? 어거스틴은 그녀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보았습니다. 이 전통 때문에 성화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많이 나옵니다. 중세 그림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검은 머리카락에, 가슴을 강조해서 그렸습니다. 외경 중에 마리아 복음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는데 나중에 성녀(聖女)가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서에서도 주님 가까이에서 사역을 돕고, 제자들을 뒷바라지하는 헌신적인 여인으로 나옵니다. 마가복음 15장 40절 이하를 보면 주님의 임종을 지킨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고, 주님을 장례한 무덤을 확인한 여인도 그녀였고, 주님의 빈무덤을 발견하고 한 없이 울었던 여인도,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여인도,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었다면, 성녀가 된 그녀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고정관념이 있었다면 주님이 낮고 천한 사람을 서스럼 없이 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미래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죄가 이 간음한 여인보다 못할 것 같습니까? 주님이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할 때 다 달아났듯이 우리 가운데도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고 그래서 내일이 있는 희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우리도 주님처럼 사람을 희망적이고 가능성의 존재로 바라보고 삽시다. 과거로 그 사람을 단정하지 말고, 살아있는 존재를 고정된 눈으로 심판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살아있는 존재로 보십시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그 희망에 부응하고, 우리 주위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의 큰 영광을 확인하는 은혜와 복이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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