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02m: 빛과 소금(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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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일 사순절 넷째주일/사회봉사주일 낮예배
본문: 마 5:13-16
제목: 빛과 소금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본문은 주님의 산상보훈에 나오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많이 들어 본 말 중 하나가 “빛과 소금”이라는 말입니다. 소금은 인류가 사용해 온 가장 오래된 조미료요 방부제였습니다.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제단에 항상 소금을 준비했는데, 정결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또 계약을 맺을 때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더군다나 팔레스틴 지방은 더운 지방이어서 소금이 더욱 필요했습니다. 동서양 종교를 막론하고 소금을 사용치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아마 지금도 마당에 소금을 뿌리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재수없는 사람이 다녀가면 그 사람으로 인해 내 집이 부정탈까봐 소금을 뿌립니다. 모차르트를 배출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음악도시 잘츠부르크는 중세 때는 서부 유럽 중 가장 잘 살았던 도시였습니다. 본래 오스트리아 말로는 “잘츠”가 아니라 “살츠”입니다. 소금이라는 뜻입니다. 그 도시에 가보면 폐광이 되었지만 소금광산이 많이 있습니다. 중세 때는 소금을 캐서 다른 나라에 수출해서 그 도시가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소금이 귀했고 비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향해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고, 귀하고 비싼 인간 생존에 필수물질이 소금인데, 너희가 바로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양신을 안 섬기는 종족이 없다고 합니다. 빛을 섬긴다는 겁니다. 빛이 귀했던 나머지 숭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요즘도 정월대보름날 달 앞에 절을 합니다. 정월 초하룻날 일출을 보기 위해 밤을 새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불을 밝히기 위해 감람유를 썼습니다. 식용유를 쓴 겁니다. 그만큼 비싼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옥형태를 보면 벽에 창이 하나 있거나 없는 집이 많습니다. 대낮에도 집안에 들어가면 캄캄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빛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냥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점입니다. 이 말씀에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어둡고 부패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본질적으로 어둡기에 너희가 빛으로 세상을 밝히고, 세상은 본질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기에 너희가 소금으로 존재하며 부패를 막으라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 사회적인 책임과 역할과 기능을 우리에게 제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을 탓하거나 부패한 세상을 핑계하면 안 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은 우리 자신을 탓하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해 세상이 점점 더 부패해 가는 겁니다. 그 사회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전적으로 빛과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점점 더 썩어가는데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해야 할 의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을 예고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다니면서 의인을 찾아 보겠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의인 50명을 찾겠노라고 합니다. 자신이 없자 45명이라고 낮춥니다. 40명, 30명, 결국 10명까지 내려옵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에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의인 10명이 없어 하나님의 유황불이 소돔과 고모라에 쏟아집니다. 그들이 왜 망했습니까? 악인 때문입니까? 죄인 때문입니까? 의인이 없어서 망한 겁니다. 세상은 악한 곳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 역할을 감당하면 그 세상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요즘 기독교가 수난을 당합니다. 제가 소개해 드린 본문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합니다. 요즘은 기독교를 개독교라 하고, 목사를 먹사라 하고, 집사를 잡사라고 합니다. 남 탓할 것 없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밟힌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소금이 짠맛을 내고, 등불이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왜 우리는 주님이 우리더러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했음에도, 우리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빛과 소금은 반드시 자기희생이 있어야 빛을 발하고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기 위해서는 자기를 해체하고 분해해야 합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소해야 합니다. 산화해야 합니다. 기름은 자기를 태워야 하고, 양초도 자기를 녹여야 합니다. 자기희생 없이는 빛을 낼 수 없고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의 태양도 자기를 태우면서 빛을 내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도 땅에 떨어져 썩어야 비로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썩지 않으면 한 알의 밀알 그대로입니다. 자신을 태운 만큼만 빛을 내고, 자신을 녹인 만큼만 짠맛을 냅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누구도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손해가 되기 때문이고, 양보해야 하고, 녹여야 하고, 자신을 포기해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차하고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요즘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자기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정체성을 어떻게든 감추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바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인이 아닌 듯이 자기를 위장하면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세상을 보면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일반인인지 모릅니다. 모두 익명의 신자로 살아갑니다. 당당하게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임을 드러내면서 희생하고 양보하고 헌신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싫어서 몰래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중인격, 다중인격이 되었습니다. 주일날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만 신자이고, 밖에서는 전혀 아닙니다. 자기희생을 용납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해체되기 싫고, 자기를 녹이는 일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자기희생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큰 교회로 몰려가는 이유가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필요만 채울 수 있으니까, 가장 이기적인 신앙생활하는 것을 보장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의 극치인데, 자기희생의 상징인데 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해체하고 찢어발긴 사건이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 아래에 모여서 십자가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게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실상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는데, 자기 부정을 하면서 오라고 하는데, 자기희생을 하면서 오라는데, 우리는 가벼운 걸음으로 산책하듯 따릅니다. 그러니 걸음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밖에 버리워진 소금으로 정신없이 밟히고 있는 겁니다. 원래 등불도 꺼지면 연기만 나고 냄새만 납니다.
주님이 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사느냐면 안식일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항상 안식일을 범하시되 고의로 범하셨습니다. 안식일날 환자를 고쳐서는 안 되는데, 그것도 유대인의 본산인 회당에서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마른 사람을 고칩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꼭 고쳐야 할 환자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과의 불화를 자초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니까 그것도 두둔하셨습니다. 결국 안식일 문제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되는데, 왜 주님이 안식일을 고의로 범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의 이중구조의 신앙을 고발하신 겁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날은 얼마나 경건한지 모릅니다. 평일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고의로 파괴하시면서 안식일의 지평을 평일로까지 확장하신 겁니다. 안식일만 경건하게 살지 말고 평일에도 빛으로 소금으로 살라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고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미워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서만 경건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바에야 성전을 헐고 온 세상을 성전화하라는 겁니다. 이중구조의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성전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빛으로 소금으로 살라는 겁니다.
어제가 삼일절이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초기에는 참 순수했습니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었고, 그야말로 자기를 희생해가며 세상을 밝히는 일에 용감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세상사람들도 교회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교회가 참 작고 소박했을 때인데도 교회를 선망했습니다. 그래서 전도도 잘 되고 그 덕분에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덩치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한국교회의 위상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세상의 언론매체들이 교회가 썩었다며 고발하고 개혁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거꾸로 된 것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의 비참한 모습이고 오늘 한국교회의 숨길 수 없는 현주소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본연의 위상과 대 사회적 책임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하십시다. 이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 자기해체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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