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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m: 마라의 쓴물(출 15:22-27) 대강절 둘째 주일

2009년 12월 6일 주일낮예배/대강절 둘째 주일
본문: 출 15:22-27
제목: 마라의 쓴물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애굽기 15장의 구성을 보면, 1절에서 21절까지는 노래입니다. 무슨 노래냐면 홍해를 건넌 직후에 부른 승리와 감사, 감격, 구원과 기쁨의 노래입니다. 앞에는 홍해고, 양쪽은 온통 높고 험한 바위산입니다. 그리고 뒤에는 성난 애굽의 전차부대가 무서운 기세로 추격해 옵니다. 사면초가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검붉은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셔서 200만이 되는 이스라엘을 안전히 건너게 하시고, 뒤를 쫓던 애굽 군대는 수장시키셨습니다. 이보다 더 감격스런 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1-21절까지 승리와 감격의 개가를 부른 겁니다.

그런데 22절부터는 분위기가 딴판입니다.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22-23절입니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애굽 군대가 몰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하며 구원의 노래를 부른 것도 잠깐입니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발견했습니다. 다들 안도하는데 그 물은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너무 짜서 쓴 것입니다.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룻기 1장 20절을 보면,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고 합니다. 각주를 보면, 나오미는 기쁨이고 마라는 괴로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홍해도하라는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으나 지금은 마라에서 쓴물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게 당시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이요 오늘 우리의 세상살이입니다.

홍해도, 마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홍해 앞에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왜 하나님이 쓴물이 나는 마라로 이스라엘을 이끄셨을까요? 왜 홍해의 감격을 더 누리게 하지 않고 불과 삼일 만에 마라의 쓴 고통을 겪게 하실까요? 한 때는 좋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는 잘 나갔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쓰디 쓴 고배를 마시며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런 분 없으십니까?

삶에서 마라의 쓴물은 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본문을 보니 하나님이 시험하셨다고 합니다(25). 마라의 쓴물을 맛보아도 여전히 구원의 감격으로 찬송하는지 안 하는지를 하나님은 시험하십니다. 왜냐면 평안할 때는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와야 우리 인간성이 다 드러납니다. 애굽 군대의 멸망을 보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을 때는 기쁩니다. 그러나 마라에서 만난 샘물이 쓴물이면 당장 본색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원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뜻입니다. 21절까지 기쁨과 감격의 노래를 불렀는데, 22절에 가서 벌써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일이 잘 될 때는 모릅니다. 망해봐야 합니다. 쓴 잔을 마셔봐야 합니다. 그 때도 감사와 찬양을 하면 진짜입니다. 마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광야 같은 세상을 사시다가 마라를 만날 때 잘 하셔야 합니다. 내 인생에 쓴 잔이 다가왔을 때 믿음을 발휘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잘 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산입니다. 초신자들일수록 그렇습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믿으면 내 인생에 절대 쓴 잔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기 시작하면 전에 없던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고의로 아픔을 겪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는 판판이 실패했습니다. 우리도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쓴 잔을 주시면, 낯 색이 변합니다. 어제까지 좋다고 하다가도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기도해서 빨리 응답이 안 되면, 하나님께 협박합니다. 살아가다가 마라의 쓴물을 만날 때 실족하지 마십시다. 이스라엘을 닮으면 안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는 하나님께 내 천한 인간성을 드러내지 마십시다. 나에 대한 신뢰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래야 복 받습니다.

마라의 쓴물은 결국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은 그게 어떤 것이든 저주입니다. 재앙입니다. 마귀가 내게 주는 쓴 잔은 비상이요 사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쓴 잔은 보약입니다. 입에는 비록 비상처럼 쓸는지 모르지만 몸에 좋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시험이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시험이 즐겁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인 것은 사실이나 즐거운 시험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시험을 봐야 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 자녀에게 진급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안 보면 편합니다. 그러나 진학, 진급, 취업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급해서 영광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입니다. 이사야 38장 17절입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주시는 것이 시험입니다. 이것이 마라의 비밀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즐기기 위해 우리에게 시험을 주는 게 아닙니다. 마귀는 그렇게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닙니다. 전에 큰 시험을 겪던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제가 이게 다 하나님이 집사님을 사랑해서 주시는 시험이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게 무슨 사랑이냐’며 발끈하는 바람에 모두 무안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 두라는 자식에게 그냥 내버려 두면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때려서라도 공부하게 하는 게 부모의 사랑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쓴 잔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시며 마신 것도 그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라의 쓴물 다음은 어떻습니까? 27절입니다. “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엘림은 마라로부터 10킬로미터, 낙타로 2시간 거리입니다. 그야말로 엘림은 파라다이스입니다. 이스라엘은 거기에 장막을 쳤습니다. 마라의 쓴물 다음에는 엘림의 단물이 있습니다. 그것도 멀리 있지 않고, 엘림은 언제나 마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라가 전부인 줄 압니다. 엘림의 단물은 마라에서 멀지 않습니다. 내 현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절망할 필요도 자살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과 2시간 거리에 엘림이 있습니다. 마라를 축복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마라는 엘림으로 가는 과정이요 관문입니다. 어련히 하나님이 엘림으로 우리를 이끌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과정 중에 마라가 있을 뿐입니다. 쓴물은 단물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쓴물이 있어야 단물의 소중함을 압니다. 마라 때문에 엘림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계가 너무도 분명합니다. 마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라의 쓴 물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백성이 원망하자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며 그 나무를 던지라고 하자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치료하는 하나님임을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로, 맹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며, 기갈을 해갈로 만드시는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비뚤어진 인격과 정서, 환경, 처지도 하나님이 다 고치십니다. 우리의 빗나간 인생도 다 새롭게 하십니다. 무엇으로 고치십니까? 무엇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무엇으로 쓴물을 단물로 만드십니까? 한 나무입니다. 어떤 나무입니까?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하나님이 가리키신 나무는 바로 이 나무입니다. 쓰디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킨 것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나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처방이요 절대적인 처방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고난 기사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주님의 십자가 주변에는 온통 마리아들뿐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기도 하지만, 마리아라는 이름에는 ‘마라’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라의 파생어가 마리아입니다. 쓴 것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현장에는 온통 마리아들뿐입니다. 그 한복판에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십자가가 서있습니다. 쓰디 쓴 마라에 십자가가 던져진 것입니다.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성탄은 주님이 마라의 쓴 물에 자신을 투신하신 사건입니다. 마라의 쓴물을 마시고 고통하는 인생을 구하기 위해, 단물로 변화시키기 위해, 지척에 단물이 있음을 모르고 목말라 고통하는 우리를 엘림으로 이끄시기 위한 사건이 바로 주님의 오심입니다. 하나님이 가리키는 한 나무로 주님이 오시는 사건이 바로 성탄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우리는 성탄하시는 주님을 새로운 감격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워지고 치료받습니다. 그래야 엘림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처방인 주님의 성탄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고치고,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고, 마라를 엘림으로 변화시키는 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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