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id": "xe-241",
  "title": "20080227w: 고린도후서강해 1",
  "authors": [],
  "category": "sermon",
  "dates": {
    "registered_at": "2008-02-28T12:26:03",
    "original_updated_at": "2008-02-28T12:26:03",
    "published_on": null,
    "delivered_on": null
  },
  "tags": []
}
---
<!-- paragraph:p0001 -->
<p>2008년 2월 27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후서 강해 1<br>본문: 고후 1:1-11</p>
<!-- paragraph:p0002 -->
<p>[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p>
<!-- paragraph:p0003 -->
<p>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서신입니다. 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고 6개월 후에 고린도에 또 편지를 보냅니다. 고린도후서가 바울의 서신인 증거는 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배경 중 하나가 바울의 사도권을 고린도 교회가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에도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에 사분오열이 생기는데,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뉩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은 진정한 사도일 수 없다는 여론을 조장합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 사실상 고린도 교회 내부문제가 상당부분 수습이 되었으나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활동은 오히려 더 활발해 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두 번째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 이라고 밝힙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되었다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두둑한 면모입니다. </p>
<!-- paragraph:p0004 -->
<p>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주후 55년 말이나 56년 초쯤에 썼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썼습니다만, 고린도후서는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에서 기록합니다. 그리스 남부를 아가야 지역이라고 합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에 속합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즉 그리스 북부 지역에 속합니다. </p>
<!-- paragraph:p0005 -->
<p>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써 보내자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거짓교사들, 곧 유대인들로서 복음을 수용한 사람들은 여전히 바울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복음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메시지를 부정했습니다. 복음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사두개파 출신의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바울의 사도성을 부정하도록 고린도 교회의 분위기를 조장했습니다. 그들은 복음도 믿고 율법도 지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의 가르침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쓸 때 큰 짐이 되었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일정이 변경되자, 그들은 이를 꼬투리 잡아서 언행일치를 못하는데 어찌 사도라고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했는데, 그들은 그것도 바울이 헌금착복한다며 문제삼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두 번째로 펜을 든 것입니다. </p>
<!-- paragraph:p0006 -->
<p>그래서 고린도후서의 구성은 세 부분입니다. 우선 바울의 고린도 방문계획 변경이유를 밝힌 것이고, 구제헌금 요청에 대한 해명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강변합니다. </p>
<!-- paragraph:p0007 -->
<p>오늘 본문은 바울의 인사말입니다. 그 내용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아가야 지방에 있는 성도들에게 격려합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은혜와 평강”을 빕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은사이고, 평강은 헬라말로 에이레네, 히브리 말로는 샬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 그 결과 평강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항구적인 평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국력을 키워서 평강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어떤 환난이나 고난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p>
<!-- paragraph:p0008 -->
<p>3-4절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절 이하를 보면 환난과 위로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그 어떤 환난 중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샬롬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8-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환난 중에도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평안과 위로를 경험했다는 간증입니다. 아시아는 지금의 터키입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 도보로 아시아에서 전도했습니다. 어떤 때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느낄만큼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평안을 누리며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큰 깨달음도 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케 하기 위해 자신들을 극심한 고난에로 내모셨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는 바울의 간증이 많이 나옵니다. 6장 4절 이하입니다: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유명한 11장 23-27절입니다: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거짓교사들과 대비시켜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간증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한 대 더 때리면 죽기 때문에 서른 아홉만 때립니다. 이렇게 살 소망까지 끊어질 만큼 극심한 고난을 아시아에서 겪었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 와중에도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서 종살이하며 고통을 겪는데, 창세기에 보면 항상 ‘요셉이 형통했다’고 합니다. 이 형통이 평안(에이레네, 샬롬)입니다. 고난 중에 느끼는 평화가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입니다. 바울이 비는 평안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br></p>
<!-- paragraph:p0009 -->
<div><!-- paragraph:p0010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div>

<div class="archive-resource-links"><a href="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glxX2YDWoQ0%24" title="원문 미디어 링크 (이용 상태 미확인)"></a></di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