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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2009년 11월 29일 주일낮예배<br>
본문: 막 3:1-6<br>
제목: 현실 교회</p>
<!-- paragraph:p0002 -->
<p>[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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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r>
벌써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 여러분은 어떻게 교회생활을 해 오셨습니까? 여러분의 교회생활을 자평하면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주님과 연말결산을 할 때 2009년 교회생활 과목은 몇 점이나 받으셨습니까? 오늘은 주님 앞에서 올해의 교회생활을 결산한다고 생각하시고 본문을 보겠습니다.</p>
<!-- paragraph:p0004 -->
<p>1절을 보니 회당이란 말이 나옵니다. 원어로 시나고게입니다. 유대인에게 성전은 예루살렘만 있었고, 지방에는 다 회당만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은 안식일에는 예배하고, 평일에는 율법을 교육하였습니다. 회당이 성전 기능과 교육 기능을 겸했습니다. 그러므로 회당은 유대교의 본산이고, 그들 공동체의 질기디 질긴 구심 공간이었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에게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 됩니다. 예루살렘에서만 100만이 죽었습니다. 수십만이 노예로 잡혀가고, 수백만이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집니다. 디아스포라 라고 합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구약시대부터 그 운명이 기구해서 많이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미 주후 70년 이전에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떻게 전통 종교인 유대교를 철저히 계승할 수 있었을까요? 회당 때문입니다. 디아스포라로 살면서 항상 그들은 회당(시나고게)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들의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로 율법을 공부하고, 전통 문화를 계승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해외에 많이 나가 삽니다. 그런데 2, 3세대 가면 우리나라 말 다 잊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2000년 3000년이 지나도록 자기 나라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 주에 한 번은 회당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 그들의 구심점인 회당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문화는 회당문화입니다. 그 민족 공동체의 구심 공간인 회당에 모여 자기들의 고유한 언어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한 겁니다. 그러면서 민족의 동일성과 정체성을 수천년 간 지켜온 것입니다. 유대인 공동체였던 회당은 우리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의 전신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회당이야말로 우리 기독 교회의 구약적인 모델이요 형태입니다. 그러면 주님 시대의 회당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p>
<!-- paragraph:p0005 -->
<p>1절을 보니 회당에 한 쪽 손이 불구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멀쩡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회당으로 말하면 선민 이스라엘의 공동체요,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의 공동체인데, 여기에도 장애인이 있습니다. 다 건강하고 장애가 없으면 좋겠는데 그것은 환상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도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다가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 보고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합니다. 6장에서도 각색 병자들을 회당에서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교회는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주님도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소용이 있듯이, 인자는 죄인을 구원하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환자들이 참 많습니다. 장애인이 많습니다. 어딘가를 못 쓰는 불구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손발이 척척 맞지 않습니다. 항상 삐걱거리고 잡음이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많아서 그렇고, 환자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엄밀히 얘기해서 장애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다 중증 환자들입니다.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다 장애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현실 교회입니다. 구약 유대교나 주님 시대에도 회당 안에는 각색 병든 자, 더러운 귀신 들린 자, 한 쪽 손이 불구인 자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전신인 회당이나 회당의 후신인 교회나 다 그런 곳입니다.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고 호흡이 맞지 않고, 부작용이 항상 있습니다. 올해도 교회생활 하시면서 중증 환자들에게 많이 시달리셨습니까? 장애인인 그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아픔을 주었습니까? 이해하십시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멀쩡한 사람만 있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교회에는 다 몸과 마음에 병을 가진 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일수록 중증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사야 1장을 보면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상처투성이 환자가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모습입니다. 다 상처요 다 아픔이며 고통입니다. 나도 남 못지않게 다른 사람에게 시험과 아픔을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목사도 장애인이다 보니 남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지만, 성도들도 목사 못지않게 목사를 아프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좀 더 관대하십시오. 남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나도 그 사람 못지 않게 아픔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p>
<!-- paragraph:p0006 -->
<p>그뿐만 아니라 2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이라고 합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엿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4절 말씀처럼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인데 어떻게든 모함하고 고소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렸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니까 주님이 탄식을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6절을 보니 바리새인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회당 안에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데, 꼬투리를 잡으려고 엿보고 있고, 모함하려고 작당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모의했다는 것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종교인들이 정치인과 야합했다는 것입니다. 회당 안에서 이런 일이 다 벌어졌습니다. 교회는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교회는 마치 옛 방주와 같다고 했습니다. 방주가 얼마나 좁고 답답했습니까? 창이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짐승들이 1년 동안 먹고 쌌으니 냄새가 얼마나 진동했겠으며, 짐승이 울고 싸우니까 얼마나 시끄러웠겠습니까. 회당은 교회는 그럼에도 방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주가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 좁고 답답하고 냄새나고 시끄러운 방주를 통해 노아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회당과 교회도 바로 그런 곳입니다. 쾌적하거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곳이 교회이기 보다는, 모함과 수작,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는 작당이 있습니다. 주님도 이런 회당에 당하셨습니다. 이게 현실 교회의 한계와 모순이며, 진실입니다. 막연한 교회에 대한 이상은 금물입니다. 절대 이롭지 못합니다. 교회는 이토록 치열한 곳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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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주님은 회당에 계셨습니다. 여러분, 복음서를 주의 깊게 보십시오. 주님이 세상에 나가 활동하시다가 안식일만 되면 회당에 가셨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마가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1장 21절 이하입니다.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안식일 날 회당에서 가르치고, 고치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안식일 날 회당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이렇게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셨습니다. 사람이 배척하고 믿지 않아도 회당에 가셨습니다. 주님의 활동무대가 회당이었습니다. 우리가 온갖 모순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면 안 되는 절대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모순이 있어도 거기에 주님이 계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며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교회냐? 그러면서 교회생활을 접으시면 안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회당 안에, 교회에 주님이 계십니다. 거기서 주님이 가르치며 구원의 권능을 베풀고 계십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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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12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거기서도 결론은 방주입니다. 마지막에 제시되는 게 방주입니다. 지금 노르웨이 사람들은 지하에 벙커 만드느라 난리인데, 교회로 가야합니다. 교회가 방주입니다. 교회가 거기보다 훨씬 든든한 구원의 요람입니다. 올해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교회를 이해하십시오. 그래서 교회가 여러분의 구원의 방주가 될지언정 구원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아무리 모순에 차고 문제가 많아도 주님은 교회에 계십니다. 교회를 통해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십시오.<br>
<!-- paragraph:p0009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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