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091115m: 전천후의 감사(골 3:15-17) 추수감사주일

2009년 11월 15일 주일낮예배/추수감사주일
본문: 골 3:15-17
제목: 전천후의 감사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요즘 달인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 제가 소개한 바울 사도는 정말 감사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처지, 환경, 여건에서도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그렇습니다. 15절 하반절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절 하반절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고, 17절 하반절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감사보다는 원망하고 싶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사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감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에 있었습니까? 바울과 껄끄러웠던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였으나, 나중에 그들은 바울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가장 아픈 부분을 찔렀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한 겁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고린도 교회가 부정한 사유를 들어보면 더 기가 막힙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0절을 보면, 몸이 볼품 없고, 말이 시원찮다는 이유입니다. 바울의 외모를 들어 당신에게는 사도의 카리스마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좀 못났던 것 같습니다. 우선 키가 작았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키가 작은 사람이 욕먹고 있습니다. ‘루저(looser)’라고 해서 욕을 먹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서방 교회 전통의 성화나 부조에 바울을 묘사한 것을 보면, 키 작고, 완벽한 대머리에, 메부리 코, 어깨가 기울고, 배 나온 모습입니다. 어디를 봐도 사도의 풍모가 안 보였습니다. 하여간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외모를 들어 사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전도한 사람을 향해 외모를 갖고서 사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그들은 바울의 말이 신통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좀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이 논리적이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신비적인 말이 없었다는 겁니다. 로마 사람들에게 최고의 학문은 수사학이었습니다. 사람을 선동해서 압도적으로 몰아가는 그런 카리스마가 바울에게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를 들어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습니다. 바울에게 외모와 화술이 부족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바울에게는 몸을 찌르는 치명적인 불치병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놓고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자기 몸을 찔렀으면 가시라고 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7절을 보면 바울은 이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 4장 14절을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는 이것을 들어 바울을 부정하고 배척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병을 두고 간질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사실이라고 하면 정말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인사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하여간 바울은 치명적인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서는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썼습니다.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사형수의 몸으로 골로새에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도 입만 열면 감사를 말합니다. 얼마나 역설적이고 불가사의합니까? 지금 바울이 자기 기만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지하의 감방에 갇혀 있으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겁니다. 바울은 그 좁고 습기찬 감옥에서 감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감사는 우리의 일반 상식과 개념이 다릅니다. 우리는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조건반사적이고 상식적인 감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감사는 이런 감사가 아닙니다.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이고 전천후의 감사를 말합니다. 감사할 일이 있어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백하는 감사는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는 겁니다. 바울은 초월적인 감사, 역설적인 감사, 전천후의 감사를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다 그런 감사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진수입니다. 신앙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런 감사가 가능합니다. 성경이 믿는 자에게 주문하는 감사가 바로 이런 겁니다. 이런 감사가 우리 입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조건반사적인 감사 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배신해도, 내 몸에 치명적인 불치의 병이 들어도,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도 그것을 다 초월하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감사, 이 감사를 바울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감사가 가능해야 비로소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 어떻게 감사하셨습니까? 그저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그런 조건반사적인 감사를 하셨습니까?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하셨습니까? 이것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가능합니다. 보다 고급의 감사를 성경이, 또 바울이 우리에게 주문하고 권면합니다. 감옥 속에서도 감사하고, 누가 나를 배신을 해도 감사하고, 암이 걸려도 감사하는 그런 감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선포하듯이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감사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감사입니다. 감사의 달인인 바울 사도의 고백이 여러분에게도 우러나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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