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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2009년 11월 1일 주일낮예배<br>
본문: 눅 12:15-21<br>
제목: 소유냐 존재냐</p>
<!-- paragraph:p0002 -->
<p>[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p>
<!-- paragraph:p0003 -->
<p>유대인 출신의 에리히 프롬의 학자를 아시지요? 그는 사회철학자요 실천분석자이며 정신분석학자로 유명합니다. 소위 신프로이트 학파의 거장입니다. 그는 글재주도 뛰어나서 어려운 주제를 쉽게 잘 씁니다. 그의 저작 가운데서 소유냐 삶이냐(Haben oder Leben)이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두 가지 인간 유형이 소개됩니다. 첫째는 소유형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소유에서 자기 삶의 왕국을 이룬 사람입니다. 소유에서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사람입니다. 소유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소유에서 삶의 목적과 목표를 수립하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존재형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은 소유가 아니라 무엇이 과연 진정한 삶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삶에 참된 뜻은 어디에 있을까에 무게 중심을 둡니다. 가치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겁니다. 에리히 프롬은 모든 사람이 이 두 유형 중 하나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p>
<!-- paragraph:p0004 -->
<p>오늘 제가 소개해드린 본문도 바로 그런 주제의 말씀입니다. 소유냐 존재냐를 묻고 싶으신 게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해 제기하고 싶은 것의 핵심입니다. 오늘 주님의 이 비유는 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외경 도마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얘가 나옵니다. 도마복음 63장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많은 토지를 가진 부자가 있었다. 어느 날 부자가 생각하기를, 내가 가꾼 저 곡식을 내 곳간에 가득 채우리라. 그러나 그날 밤 그는 죽고 말았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누가복음보다 간결하지만 핵심은 같습니다. </p>
<!-- paragraph:p0005 -->
<p>부자가 있었는데 대풍이 되어 추수해서 둘 곳이 없을 지경입니다. 올해 우리나라는 태풍도 없었습니다. 홍수도 없어서 보기 드문 풍작을 이뤘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기뻐하고 있습니까? 벼농사 같은 경우 농부들이 처치 곤란입니다. 논에서 갈아엎기도 하고, 시청이나 군청 앞에 벼를 쌓아놓고 시위하고 있습니다. 정부도 그렇습니다. 예산도 문제지만 수매를 해도 보관할 창고가 없습니다. 묵은 쌀도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우리 정부보다 낫습니다. 판단력이 뛰어납니다. 기존 창고를 부숴버리고 더 큰 창고를 짓겠다고 결정하고 시행합니다. 부자가 흐뭇해서 행복한 독백을 합니다.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p>
<!-- paragraph:p0006 -->
<p>그런데 달콤한 환상에 젖어있는 부자에게 느닷없이 죽음을 선고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실 수 있습니까? 이 부자야말로 능력있고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물불 안 가리고 몸을 던집니까? 다 이 부자처럼 여러 해 쓸 물건을 가득 채워놓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자야말로 우리 꿈을 한 발 앞서 이룬 선구자이고, 우리의 모델입니다. 소유가 곧 자기의 삶을 보장한다고 믿었기에 하나님은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소유형 인간입니다. 오직 곳간을 넓히고 거기에 많은 재물을 쌓아두는 데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던 사람입니다. 소유가 그의 인생의 궁극 목표였습니다. 그의 소유가 그를 행복하게 했습니까? 곳간을 넓히면서 쌓아둔 부가 그의 미래의 행복을 보장했습니까? 부자의 생각과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찾으셨습니다. 정말 어리석음의 정곡을 찌른 말씀입니다. 그가 믿고 의지했던 그 많은 재물이 오늘 밤 당장 죽어나갈 자기 운명에 어떤 도움이 되었습니까? 소유가 결코 우리 삶의 행복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가르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봅시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지금도 곳간을 넓히지 못해, 더 쌓아두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어리석은 부자처럼 제 멋대로 자기 인생을 설계합니다. 소유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신자에게도 돈이 지상목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물고기만 낚고 있습니다. 물고기 낚는 일이 사람 낚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물고기 낚는 게 우리 생의 목표가 된 겁니다. 어디를 봐도 더 많은 넓은 곳간에 더 많은 곡식을 쌓겠다는 사람들뿐입니다. 더 늦기 전에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를 새롭게 하십시오. 21절 말씀처럼 자신을 위해 재물을 이 땅에 쌓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쌓는 사람이 진정한 존재형 인간입니다.</p>
<!-- paragraph:p0007 -->
<p>이 부자가 어리석었다는 것은 자기 밖에 모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의 화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인물이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의 안중에는 하나님도 이웃도 없었고, 심지어 자식도 아내도 없었습니다. 끝까지 나 하나뿐입니다. 내 곡식, 내 곳간, 내 영혼, 내 즐거움... 헬라어 본문에 나 라는 말이 14번 나옵니다. 그래서 끝까지 대화는 없고 독백뿐입니다. 그는 오직 자기만의 행복과 향락을 추구한 개인주의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물론 부자가 남의 것을 갈취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내가 벌어 내가 즐기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냐며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부라 해도 그것을 절대 나 혼자 즐길 권리는 없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왜냐면 내 것이라는 나의 소유가 실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고 합니다. 내 영혼마저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은 부자는 유구무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을 찾겠다는데 무슨 이의를 달 수 있습니까? 내 재산, 내 자식, 내 심장이 정말 내 것입니까?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 내 아내, 내 남편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시적으로 내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내게 관리권만 있지 소유권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착각하며 삽니다. 내 영혼, 내 삶, 내 행복, 내 가족이 내 수고의 정당한 댓가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잠시 내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청지기 의식이 약합니다. 아직도 내가 주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라 생각하기에 내 입맛대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겁니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어리석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 착각한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존재형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p>
<!-- paragraph:p0008 -->
<p>마지막으로 자기 영혼의 진정한 필요를 부자는 몰랐습니다.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부자는 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돈 많고 재산 많은 사람일수록 그 정신은 훨씬 황폐할 때가 많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일수록,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일수록 자살 지수, 정신병자 지수가 더 높습니다. 이것은 소유의 넉넉함이 절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소유지수와 정신지수는 반비례합니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고 하나, 네 곤궁함과 가련함과 가난함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부자를 향한 고발입니다. 주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이 더 곤고하고 더 가난하고 더 벌거벗은 모습으로 비쳤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을 보면, ‘사람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영혼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부자처럼 곳간에 쌓아둔 소유로 영혼의 필요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통장을 갖고 계셔도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돈이 없어서 영혼이 죽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빈곤해서 영혼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착각하지 마시고, 재물보다 은혜를, 말씀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내 영혼의 안식을 위한 참된 비결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성도로, 소유형 인간이 아니라 존재형 인생이 되시길 빕니다.<br>
<!-- paragraph:p0009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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