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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2009년 9월 13일 주일낮예배<br>
본문: 눅 14:16-24<br>
제목: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p>
<!-- paragraph:p0002 -->
<p>[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p>
<!-- paragraph:p0003 -->
<p><br>
여러분이 성경을 보시면서 예수님의 화법, 수사학에 많은 감동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체험을 소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가사 전달이 잘 되었고, 듣는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얻으셨습니다. 그냥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 게 아니라 실제 날아가는 새를 가리키며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새를 보호하듯 너희를 보살핀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샤론 골짜기에서 백합 향기가 피어오르자 그 백합화를 가리키며 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실 때는 물고기를 잘 낚는구나 하시면서 이제 나를 따라와서 사람을 낚아 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을 겁니다. 한 번은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가 찾아오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누가 내 형제요 부모냐,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형제요 부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배가되었습니다.</p>
<!-- paragraph:p0004 -->
<p>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바리새인이 초대한 잔치자리에서 잔치비유를 하셨습니다. 현장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2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잔치라고 합니다. 어쨌든 잔치를 마련하고 다시 종들을 불러 다시 손님을 청합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을 보면 더 구체적입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주님 시대에는 잔치 초청을 두 번 걸쳐 합니다. 며칠 전에 먼저 초청하고, 잔치 당일에 또 가서 초대합니다. 남을 초청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초대 받은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구실로 하나같이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18절 이하입니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밭을 사고, 소를 사고, 결혼했다는 게 다 그들이 잔치 초대를 거절한 이유입니다. 당시 경제력이 허락하는 만큼 일부다처가 허락된 겁니다. 그래서 장가든 것도 경제력으로 아내를 산 겁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더 냉정합니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상업차 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외경에도 나오는데, 도마복음을 보면 네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사람은 거래 때문에, 두 번째는 집 사서, 세 번째는 친구 장가 때문에, 네 번째는 토지소작료 수금 날이어서 잔치에 못 간다고 합니다. 어쨌든 누가복음, 마태복음, 도마복음의 내용은 약간씩 차이나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아닙니까? 우리 현실을 꿰뚫어 보신 주님의 통렬한 풍자 아닙니까? 지금도 밭 사고, 소를 사고, 결혼하느라 잔치에 못 갑니다. </p>
<!-- paragraph:p0005 -->
<p>사실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소중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왜 주님이 분노하셨을까요? 그게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천국 잔치에 응하는 것보다 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초청보다 더 중요한 인간사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의 문제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초청에 먼저 응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천국 잔치가 최우선입니다. 주님 초대에 응하는 게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0순위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너무도 일상사에 매몰되어 삽니다. 주님의 초대를 비웃습니다. 지금도 천국 잔치를 태연히 외면합니다. </p>
<!-- paragraph:p0006 -->
<p>그런데 옛날 노아 시대 때도 그랬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입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노아가 아무리 초대를 해도 누구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일어나 멸하기까지도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의 사연을 몰랐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때도 시집 가고, 장가 가고, 소 사고, 밭 사는 일에 몰두하다가 죽는 줄도 모르고 멸망한다고 하십니다. 소 사는 일로, 먹고 마시고 장가 가는 일로 천국 잔치와 바꾸지 맙시다.</p>
<!-- paragraph:p0007 -->
<p>드디어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빨리 시내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온갖 사람을 다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도 여전히 잔치 자리가 차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길과 산울가로 가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로 비유를 마무리 하십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4). 전에 청하였던 유대인은 누구도 잔치를 맛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다음에 청함 받은 사람들은 시내 거리 골목에 있던 사람입니다. 제1세계 사람들입니다. 서방의 여러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유대인 다음으로 부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런데 잔치 자리가 다 차지 않자, 변방의 사람을 부릅니다. 제3세계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맨 처음에는 유대인을 청했는데, 그들이 초청에 응하지 않자, 서방 세계를, 그들로도 잔치 자리가 다 차지 않자 제3세계 사람인 우리까지 초청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잔치 자리가 차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p>
<!-- paragraph:p0008 -->
<p>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 14절은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청함을 받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라 택함을 받지 못한 게 문제입니다. 주님의 잔치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택함 받은 사람이 적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종들로서는 누가 택함을 받았는지 모르기에 불특정 다수에게 초청장을 뿌립니다. 그러나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참석한 이는 소수입니다.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절대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게 아니라, 택함을 받았기에 믿을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초대에 응하고 주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야말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소수의 구원자란 사실의 증거입니다. 청함은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택함은 누구나 받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p>
<!-- paragraph:p0009 -->
<p>게다가 본문을 보면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가리킵니다. 강권해야 합니다. 왜냐면 마지막 때인 이 시대는 택함 받은 백성이라도 세상 문화에 너무 절어 살기에 강권하지 않으면 초대에 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강제해야만 합니다. 요즘은 신사적으로 전도하면 씨도 안 먹힙니다. 품위 있게 해서는 전도가 안 됩니다. 강권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택한 하나님의 백성이면 전도 안 해도 제 발로 걸어 나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건 전도해도 안 되고, 그것도 강제적으로 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못할 짓 아닙니까? 그래서 전도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시대 종들의 운명입니다. 그렇게 강권하지 않으면 택한 백성일지라도 잔치 자리에 나오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요 명령입니다. 우리 교회도 여러 차례 강권하자는 다짐이 있었습니다. 선서까지 하며 캠페인을 벌였는데 한 번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습니다. 강도가 낮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지난 주 제직회에서 다시 결의했습니다. 한 가정이 한 가정을 전도하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주님의 잔치 자리로 이끌어 내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이 일이 이 시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보람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br>
<br><!-- paragraph:p0010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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