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내 눈 속의 들보

아직 한낮의 볕은 뜨겁지만 어느 결에 가을은 성큼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마치 지난 여름 이 땅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들에서는 곡식 여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올해는 9월 6일 현재 모두 세 차례 국상급 장례가 있었습니다. 가톨릭 성직자 한 분과 전직 대통령 두 분의 죽음이 그것입니다. 혹 고인들에게 결례가 될까 또는 상대적으로 애통함이 큰 분들에게 누가 될까 조심스럽습니다만 누구든 한 인생의 궤적을 반추하는 일에는 죽은 자에 대한 경건한 예와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는 일이 필수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매체가 죽은 자에 대해 관대한 국민 정서를 파고들며 최상의 수사와 찬미로 무흠 영웅과 신화와 전설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동안 국민들은 무한으로 확대 재생산된 조문 모드에 빠져 거의 최면상태에까지 갔던 게 사실입니다.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자주 일방적으로 단정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가 하면 아직 상대방의 삶속에 내가 보지 못한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잘 인정해 주지 못합니다. 자신이 내린 상대방에 대한 평가에 좀처럼 다른 여지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상처를 입은 경우는 상대에 대한 평가가 더욱 가혹하며 갈수록 그런 부정적인 관성이 강화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그런 평가를 언제나 결정적인 것, 오차 없는 확실한 것, 최후의 결론처럼 믿는다는 것입니다. 흔히 <최종평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최후심판>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의 영역이 아님을 알 일입니다. 누구든 사람에 대한 <최종> 평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최종평가의 대상일 뿐이며, 우리에게는 단지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만이 허락되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반짝반짝 빛나는 비판정신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눈 속에 박힌 큼직한 들보를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자신을 오류 없는 절대적 심판자로 내세우는 교만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들보는 모른 채 오로지 남을 심판하는 일에만 혈안인 사람은 결국 그 마음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는 살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이미 그 마음속에서 아벨에 대한 최후 심판을 내렸기 때문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자신이 내린 심판에 따라 아벨을 처형한 것입니다.

모쪼록 맑고 투명한 이 가을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아픔이 없기를,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고 처형하는 비극이 없기를, 국민 모두의 가슴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