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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8년 2월 13일 수요성경공부 고린도전서 강해 40<br>본문: 고전 15:57-16:4</p>
<!-- paragraph:p0002 -->
<p>[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p>
<!-- paragraph:p0003 -->
<p>지난 주까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장을 끝내는 결론이자 마지막 당부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이라는 궁극적인 이김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최후의 승리입니다. 근본적인 이김입니다. 부활이 만약 죽었다 살아나는 사건이라면 궁극적인 승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날 뿐만 아니라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죽었다가 소생하면 또 죽지만 부활하면 두 번 다시 죽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은 육체로 환생하지만 부활하면 신비한 부활체로 살아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환생하면 다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체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육체가 가진 한계와 모순과 제약을 근본적으로 초월하는 신비한 부활체로 살아가는 사건이 부활이며 이것이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바울이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을 끝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표현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열매로 우리가 부활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라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인 이김의 산 소망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p>
<!-- paragraph:p0004 -->
<p>그러면서 바울은 58절에서 몇 가지 당부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 우리는 부활신앙이 흔들리면 다 흔들립니다.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 이렇게 고린도전서 15장을 시작하며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에 견고하지 못하면 다 흔들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앞으로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은 부활신앙에 굳게 서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내부에 부활신앙을 흔드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헬라사상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나 율법주의에 영향을 받은 유대주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사두개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쾌락주의로 갔고, 유대주의자들은 부활이 없다고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것들에 미혹되지 말고 부활신앙에 견고히 서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p>
<!-- paragraph:p0005 -->
<p>그리고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합니다. 주의 일은 세상일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일도 불가피합니다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일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세상일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세상일 이상으로 주의 일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예배의식만 치루고 세상일에 몰두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열심을 품으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p>
<!-- paragraph:p0006 -->
<p>바울은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합니다. 주를 위한 수고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우리가 영화로운 부활체로 되살아납니다. 그 때 살아있는 사람들은 산 채로 부활체가 됩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리면 죽은 자들이 부활체가 되고, 살아있는 자들도 부활체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영광이고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축복이자 영광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해의 영광도, 달의 영광도, 별의 영광도,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다고 했습니다. 부활체로 영화롭게 부활하지만 그 부활체도 급수가 있습니다. 세상 살 때에 주의 일에 누가 더욱 힘썼는지 아닌지 최후심판을 통해 가려질 것입니다. 그에 상당한 영광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빛도 빛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한 이후 천국에서 누리는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58절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부활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하나님이 다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부활이 있기 때문에, 부활이 우리 믿음의 근거요 소망이기에 주의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열심을 품으면 품은만큼 하나님이 반드시 영광으로 보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주의 일에 힘쓰고 헌신해야 옳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혼자 수고한다고 생각하며 피해의식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이 말은 호리도 남김없이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p>
<!-- paragraph:p0007 -->
<p>다음으로 16장 1-4절의 주제는 연보, 특히 구제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씀하는 구제연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입니다. 하루 3천명 5천명씩 회개했던 교회이고, 교인들이 다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던 교회인데, 이제는 다른 교회가 구제헌금을 보내줘서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교회로 쇠락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정을 듣고 자기가 돌보던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부탁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정을 전합니다. 구제헌금을 해서 돕자고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교회에 부탁을 한 것입니다. 한 때는 재정적으로 탄탄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이제는 현상유지조차 어려운 약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교회를 도왔다는 것은 이해가 쉬운데, 그 반대였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정이 다급했다는 면도 있겠지만, 오히려 골수 유대인들의 교회가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버리고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수용했다는 뜻이 더 큽니다. 유대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편견은 상상외로 크고 깊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교회의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가 받은 것은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포기한 것을 뜻합니다. 도왔던 이방인 교회도 대단했지만 구제헌금을 수용했던 예루살렘 교회도 대단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마음의 문을 열고 이방인 교회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이것이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교회에 대해서 실제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노회에서도 어려운 교회들을 돕고 있습니다. 10여개 처 이상을 돕습니다. 노회 산하 개 교회가 부담금(상회비)을 내면 노회에서는 우리 노회 산하의 어려운 교회들을 돕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미 바울도 교회들에게 당부한 구제헌금과 같습니다. 교회가 어려운 개인에게도 자선을 해야겠지만, 어려운 교회를 위해서도 구제헌금을 해야 합니다. </p>
<!-- paragraph:p0008 -->
<p>그런데 2절을 보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이 때는 이미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 후 쉬신 날입니다. 교회도 처음에는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다가 어느 시점부터 자연스럽게 주일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왜 주일이냐면, 주님이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이 부활이기에, 부활절 위에 우리 기독교를 세웠기에 안식일에서 주일로 성일이 이행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의 부활 이전에는 천지창조가 가장 기념할 만한 날이지만, 주님의 부활이후에는 더 이상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입니다. 어느 시점부터 안식일을 포기하고 주일을 지켰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이른 시기부터 안식 후 첫날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에 모여서 부활을 기념하고, 부활의 산 소망을 생각하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지금도 안식교도들이나 유대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제헌금을 바로 이 주일에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헌금도 예배행위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도 헌금함을 문 앞에 두고 자유롭게 합니다. 여러 이유로 편리상 예배시간 이외에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서적으로는 예배 시간 중에 해야 합니다. 옛날 방식이 맞습니다. 왜냐면 헌금은 예배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절충식입니다. 헌금은 자유롭게 하고 예배시간 중에 수거해서 봉헌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는 날이 아니라 주일날 헌금을 하라고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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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절은 헌금관리 내용입니다: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헌금을 하면 대표자를 뽑아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으로는 자기가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고린도교회가 함께 가라고 한다면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헌금관리를 철저하고 투명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사회에 모범이 되지 못합니다. 그 중에서 많은 부분이 교회 재정 부분입니다. 너무도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관리도 민주적이거나 투명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수십 수백억을 한 해에 집행하는 대형교회가 재정관리를 투명하게 하고 있는가는 의문의 사항입니다. 지금 보다 더 날카로운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헌금관리에 신경을 썼습니다.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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