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6m: 자유를 위하여(갈 5:1) 광복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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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16일 주일낮예배/광복주일
본문: 갈 5:1
제목: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하고, 본문 아래 13절을 보면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경은 어디서나 우리를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유의 개념을 좀 더 알기 쉽게 어린 아이와 성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2절입니다.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어린 아이가 종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과 진배없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12세 이하는 어린 아이인데, 어린 아이는 자유가 제한되었습니다. 종과 다름이 없습니다. 부모가 정한 청지기나 후견인의 보호를 받으며 그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자유인이긴 하나 12세 이하의 어린 아이는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12세가 되어야 성인식을 거쳐 성인이 되고, 유대 사회에서 누리는 자유인의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어린 아이가 아니라 성인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자유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종과 아들을 비교합니다. 종은 끝까지 종이고 아들은 끝까지 아들입니다. 아들이 개망나니 짓 한다고 해서 종 되지 않습니다. 종이 아무리 착하고 신실하다 해도 아들 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종과 아들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종이 아니고 아들이라는 말은 우리가 참된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해방, 자유라는 말이 자칫하면 관념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아주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자유인이라는데, 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라는 겁니다. 이점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자유니 해방이니 하는 말은 뜬구름 잡는 말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합니까?
우선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바울 당시 갈라디아 교회가 안고 있었던 가장 골칫거리는 유대주의 곧 율법주의였습니다. 유대주의는 고색창연한 이단입니다. 영지주의는 희랍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면, 율법주의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겁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주의 때문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율법주의는 복음뿐만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율법주의도 복음을 인정합니다. 유대교도들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율법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본문에 이어지는 2절 이하에서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주장했습니다. 유대인처럼 기독교도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겁니다. 이런 자들을 바울은 꾸짖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의 유익이 없다는 겁니다. 할례를 지키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율법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로워집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약 시대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으려 했으나, 그것으로는 안 되니까, 다시 복음을 주신 겁니다. 우리는 복음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36년간 일본 제국주의 아래 있다가 다시 해방되어 주권을 찾은 것처럼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율법, 모세5경, 할례를 받습니다. 고행이나 수도를 장려하고, 공덕을 축적하라고 가르치는 가톨릭도 율법주의 경향이 농후합니다. 안식교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이나 윤리, 규범, 인간의 노력, 정성, 치성을 강조하는 세상 모든 종교는 다 율법주의입니다. 자신들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다 율법주의 종교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죽어서 좋은 데 간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다 율법주의입니다. 행위로는 절대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가 착하다고 하는 것은 다 상대적인 겁니다. 저 사람 예수 믿지 않아도 좋은 데 간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착하고 선하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선, 착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다 보실 때 우리는 다 똑같습니다. 63빌딩이나 남산타워, 2층 상가나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터 주신 겁니다. 믿음이지 율법으로는 안 됩니다. 공자도 부처도 다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해 다 죽은 자들인데, 율법과는 완전히 결별해도 좋습니까? 율법 폐기론을 주장해도 괜찮습니까? 우리에게는 율법이 더이상 필요 없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더이상 율법이 필요 없지만, 성화를 위해서는 율법이 여전히 유용합니다. 구원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아서 천국가기 전에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을 많이 닮아가야 합니다.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는 이 땅에서의 성화가 결정합니다. 구원만 받으면 천국은 가지만, 천국 가서 영원히 살며 누릴 영화는 성화가 결정합니다. 전에는 율법이 강제였으나 이제는 아닙니다. 율법을 안 지켜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용한데,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자발적 성화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닮은 모습으로 심판대 앞에 서면 상급이 큽니다. 그러나 형편없는 꼴로 천국을 가도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둘째,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입니다.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보다 더 놀라운 자유의 의미는 없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 중의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었다고 해도, 이 대목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안타까운 신자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겐 더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진리의 에센스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온몸으로 실감해야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예수 안 믿을 때는 죄를 지었으나 지금은 죄를 안 짓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바울 같은 위대한 분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않고,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라’고 비명을 지릅니다. 이런 갈등과 분열을 여러분도 다 겪고 계실 것입니다. 내가 죄에서 해방을 받았다면 더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여전히 죄를 짓고 사는 모순, 이율배반, 분열증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합니까? 구원파는 우리가 완전히 거듭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럴 듯하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원치 않는 죄를 짓는다며 비명을 지르는데, 무슨 소립니까. 구원받았다고 해서 죄를 안 짓는 게 아닙니다. 박옥수 목사도 죄를 짓고 삽니다. 불완전한 구원이 아니라 옛 사람의 버릇 때문입니다. 내 몸에는 죄성이 남아 있는 겁니다. 죄로 해방되었다 해서 그 죄의 근성이 내 몸에서 해소되는 게 아닙니다. 일제의 잔재가 아직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식민지 생활을 하는 게 아닌데, 우리 사회 제도에, 우리 정서에, 습성에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윽박질러 그런 게 아닌데도 36년간 그들 밑에서 살았기에 그 부작용이 남아 있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던 때의 관성이 남아 있는 겁니다. 죄의 탄력이 우리 몸에 남아 있는 겁니다. 원치는 않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죄를 짓는 겁니다. 출애굽을 했음에도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내내 애굽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며 짓는 죄와 전에 마귀의 하수인으로 살면서 지은 죄는 분명 성격이 다릅니다. 이제 우리의 소속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너무 오랫동안 죄의 종노릇을 해왔기에 금단현상이 있는 겁니다. 죄의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겁니다. 정서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죄 쪽에 훨씬 친화적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홍해를 건넌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운명적으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인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아무리 잘못을 범해도 정죄할 법이 없으면 처벌을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법, 사망의 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할 법이 없어졌고, 이제 우리는 생명의 법만 저촉을 받습니다. 오직 생명의 법뿐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의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세 번째는 초등학문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 이하입니다.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 당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율법과 죄뿐 아니라 세상 초등학문으로부터도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천박한 초등학문은 당시 희랍 문화권에서 성행하던 점성술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을 보면, ‘원시종교’라고 했습니다. 미신으로 번역한 겁니다. 요즘도 예수를 믿으며 날을 따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주, 궁합, 토정비결을 봅니다.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도 꼭 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시 갈라디아 교회 내에도 많았습니다. 별자리를 보고, 점을 쳤습니다. 이게 다 천박한 초등학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원시종교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손 없는 날 따지지 마시고 차라리 손 있는 날 저렴하게 이사하십시오. 오늘의 운세 보실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철학관에 가서 작명하지 마시고 제게 오십시오. 우리는 그런 것에서 졸업한 자유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왜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느냐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의 50% 이상이 점집을 찾는다고 하고, 개신교도들도 25%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점집을 간다는 겁니다. 구역예배 보고 구역장이 인솔해서 유명한 점집을 간다고 합니다. 단체 할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귀신 같이 잘 맞힌다고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비굴한 종의 멍에를 매지 마십시오. 종이 아닌 아들로, 어린 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사십시오. 그렇게 살라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의 해방절인 광복절을 맞아 영적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되새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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