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자유인의 노예 근성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자유한가? 더 이상 어떤 것의 종도 아닌가? 놀랍게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현실을 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사주를 보고 관상을 보고 <오늘의 운세>를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복음 시대를 살면서도 여전히 구약의 율법조항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논외로 하겠습니다. 문제는 주의 이름하에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오히려 윤리적인 삶에서 자주 좌절감에 사로잡히고 현실 속에서 비겁해지는 현상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인 탓입니다. 즉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는데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죄책이 그로 하여금 늘 불안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가령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돌려대라>거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갖다 주라>거나 혹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등은 아무리 성경을 축자적으로 무오하다고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는 의식, 무의식 속에서 불안과 죄책에 사로잡혀 자유인의 기상은커녕 비굴한 노예의 몸짓을 보일 수밖에 없고, 남에게는 성경 귀절을 법조문처럼 적용해도 자신은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위선자, 외식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 성경 말씀을 율법화 하여 문자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며 자유인임에도 새삼 종의 행태로 돌아간 율법주의자들의 필연의 과오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이해한 사람 중에는 톨스토이와 니이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금욕주의의 노예가 되었고, 니이체는 복음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혹평했던 것입니다.

<하지 말라>와 <하라>를 문자적으로, 직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종이요 어린 아이입니다. 자유한 아들은 <하라>는 말씀에서 <하지 말라>를 듣고, <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하라>를 듣습니다. 성경 말씀은 노예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아들 된 자의 이해에 호소하는 아버지의 육성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항상 내게 주어진 구체적인 상황, 즉 삶의 한복판에서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상황과 말씀은 내게 하나의 물음이 되고 나는 그 물음 앞에서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이 나를 책임적인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자유한 아들의 복종이요 책임적인 자유인의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불트만(R. Bultmann)은 하나님의 뜻(Gottes Wille), 상황(Situation), 그리고 결단(Entscheidung)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필수불가결의 요소로 봤는데 옳았습니다. 이 광복주일 아침에 다시 한 번 자유와 해방의 개념을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